[천지일보=송범석 기자] 김규나 작가는 배신과 애증 중독 파멸이 뒤엉킨 토막토막의 상처를 사물에 투영시키는 데 놀라운 감각을 가졌다. 그가 배치하는 사물 하나하나의 형상은 살아있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는 시간의 틈새 속에서 푸른 이끼가 끼고 거미가 줄을 치는 광경을 상상하며, 죄어드는 가슴을 아가미가 도려진 채 바다에 버려진 물고기와 오버랩한다. 엇갈린 사랑과 결핍된 생의 끝자락에서 던져지는 세밀한 언어들은 오래도록 천국과 지옥이 뒤섞인 뒷맛을 남긴다.

제목인 <칼>은 수록된 단편집 중 하나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소설에서 국과수 부검의인 여자와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남자는 혼란한 생을 감당하면서 딱 두 번 만난다. 첫 만남은 현란한 사이키 조명이 쾌락을 설파하는 나이트클럽에서였다. 외과원장이었던 아버지가 의료사고로 생을 내던진 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여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아내와 살고 있는 남자. 그들은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격정적인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육체를 통한 안위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각자의 길을 간다. 그 뒤 남자는 지금껏 지켜온 삶의 허상들을 견뎌내지 못해 결국 약을 먹고 아내 앞에서 생을 마감한다.

며칠 뒤 여자는 남자와 다시 만난다. 부검대 위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본 여자는
처음으로 작업이라고만 생각했던 사체부검에 감정이 실린다. 갈라진 몸에서 장기가 꺼내지고, 덩그러니 남자의 몸이 비어가는 동안 여자의 머릿속은 남자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다.

두 사람이 가진 내면의 ‘칼’은 여자가 몸을 가를 때 사용하는 메스로 형상화된다. 광폭하고 처연한 고독감이 스스로의 칼이 되어 두 사람을 베어간다. 완전히 자신을 난도질한 남자는 죽고, 그 남자의 생생한 죽음을 목격하는 여자는 짙은 동질감에 몸서리친다. 이제 여자는 옥죄는 가슴으로 남자를, 그리고 자신을 생각한다.

소설집에는 모두 12작품이 담겨있다. 섬세하면서도 저마다의 느낌이 다른 문장력을 느낄 수 있다.

김규나 지음 / (웅진문학에디션)뿔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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