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만나다
[쉼표]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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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 이곳에서 정약용은 18년의 유배기간 중 11년을 지낸다. 이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 이곳에서 정약용은 18년의 유배기간 중 11년을 지낸다. 이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젊은 임금 정조를 만나 등용
수원화성 거중기, 배다리 등
문관이면서 공학에도 두각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
유배지에서 꽃 피운 수많은 저서

[천지일보=이민환 기자] 유난히 붉은 흙이 많은 전남 강진, 강진만 바다를 바라보는 만덕산의 입구에 백련사라는 천년고찰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은 초의선사, 혜장법사 등과 차와 시국담을 나누며 이곳 만덕산의 숲길을 거닐었다고 알려져 있다.

흐드러진 백련사의 동백나무 숲을 지나면 호를 다산(茶山)이라고 지을 만큼 넓게 차밭이 펼쳐져 있다. 차 밭을 뒤로 좁고 길다란 나무계단 숲길을 따라가면 만덕산 한 가운데 작은 ‘다산초당’을 만날 수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숲길.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숲길.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숲.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숲.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원래는 초가집이었던 다산초당이지만, 1950년대 지금의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생활 중 가장 오랜 시간 지냈으며 다산의 외가에서 마련해준 곳으로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다빈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뛰어난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조선 최고의 학자를 꼽으라면 첫 손에 꼽힐 다산은 어떻게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됐을까.

◆젊은 임금 정조와의 관계

위당 정인보는 정조와 다산의 관계를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산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장할 당시 한강을 가로질러 배다리를 놓고 화성을 쌓았다.

비운의 아버지를 둔 정조는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규모 행차를 11년간 열었다. 이 행차는 정조는 24년의 재위기간 동안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조 배봉산에서 화성 현릉원(지금의 융릉)으로 옮긴 후 11년간 총 13번의 원행(園行)을 했다. 지금도 정조대왕능행차로 불리는 이 대규모 행차는 배다리와 거대한 수원화성이 있었으므로 더욱 의미를 갖는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왕권을 과시해 대신들이 견제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당시 남인은 퇴계의 이론을, 노론은 율곡의 이론을 따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다산이 남인 명문가 자제였음에도 율곡의 이론으로 중용을 해석하는 점을 극히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만큼 정적들의 질투도 많았다. 특히 서학을 공부하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을 두고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다산의 두 형과 함께 장기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다산의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됐다.

강진만을 바라보는 천애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강진만을 바라보는 천애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저서

다산은 성리학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백성이 중심에 있어야 역사가 발전한다는 민본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성리학만 숭상하며 다른 학문을 천대하던 조선 후기에 다산은 정치·경제·역사·지리·음악·과학·국방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을 이루었다.

다산은 가히 출판사라고 해도 될 만큼 백성을 위한 수많은 저서를 남긴다.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 중 다산은 곡산 군수, 암행어사, 중앙정부 등 다양한 곳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와 관련한 500여권의 책을 많은 제자들과 함께 집필하며 후대 양성을 위해 힘을 쏟는다.

오늘날까지 읽혀지는 대표저서로는 일표이서(一表二書)가 있다.

일표는 경세유표로 중앙정치 혁신에 대한 것으로 중앙 정부가 어떻게 혁신하고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서 중 목민심서는 지방행정관인 목민관이 지켜야 할 마음가짐 자세 등이 담겨 있어 지금도 많은 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불린다. 또 흠흠신서는 형법서로 사법개혁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학술서로 남겼으며 어린아이를 위한 아동학습지까지 만들었을 정도니 얼마나 넓은 분야에 신경을 쓰는 지 알 수 있다.

다산초당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영전.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다산초당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영전.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23

◆역사 속에 살아있는 다산의 정신

우리는 대한민국 국토를 수도권 서울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굳이 궁벽한 오지를 찾기 보단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자주 찾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작가도 강진과 해남을 첫머리로 삼은 이유로 “사람들은 답사라면 으레 경주·부여·공주 같은 옛 왕도의 화려한 유물을 구경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며 “나 또한 그런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유 작가는 강진과 해남에 대해 “이 조용한 시골은 옛날 은둔자의 낙향자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라면서도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픈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있는 역사의 채취가 살아 있다”고 설명했다.

“목민관은 아래로는 백성을, 위로는 감찰을, 그 위로는 조정을, 그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 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그의 절친한 친구 문산 이재의의 아들 이종영이 젊은 나이로 함경도부령도호부로 발령 받아 부임하게 되자, 백성을 위한 통치를 하라며 지어준 말이다.

다산은 이에 대해 특히 백성과 하늘의 뜻을 강조했는데, “백성이나 하늘은 항상 목민관의 곁에 붙어있으므로 오직 백성과 하늘만은 잠시도 떨어질 수 없으니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 약 200년이 흘렀다. 다산을 억압했던 자들은 자기들만의 권력유지를 원했기에 역사에서 잊혀졌지만, 권력에서 잊혀진 다산은 역사와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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