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한국디지털융합진흥원장

 

최근 규제 샌드박스 도입을 위한 법안 5개 법안 중 지역특구법을 제외한 4개 법률안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입법으로 발의됐다. 법안은 산업·금융·정보기술(IT) 분야에서 각종 규제로 인해 막혀 있는 신기술·상품·서비스 출현과 상용화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먹거리 기술이자 미래 성장 산업분야인 블록체인, 드론, 자율주행차 등을 키우기 위한 법제도적 정책지원수단이다. 정부와 여당은 규제 샌드박스 도입으로 ‘규제 완화→혁신성장→일자리 창출’의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 내용을 보면 규제특례와 임시허가 등 파격적인 규제 완화 규정이 많이 있다. 기업이 혁신기술을 바탕으로 전에 없었던 새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일 때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기존 법제도에 의한 규제다. 규제 샌드박스는 새 상품·서비스에 맞는 기준·규격·요건이 기존 법령에 없거나 혹은 기존 규정에 막혀 신청 자체가 불가능하더라도 위원회 승인만으로 최대 2년간 예외적으로 상품·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다. 또 새로운 융·복합 기술을 바탕으로 신사업을 해보려는 사람은 총리나 각 부처 장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위원회에 신사업 관련 규제를 질의할 수도 있고 위원회는 질문 접수 후 30일 내에 회신해야 한다.

산업별로 부여되는 혜택도 있다. 정보통신 분야에는 ‘일괄처리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정보기술에서는 다양한 융합 기술이 적용된 서비스가 출현할 수 있어 2개 이상 허가 절차를 관련법에 따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금융에서는 규제 샌드박스 졸업 후 인·허가를 취득하면 1년간 배타적 운영권을 보장해주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소비자 보호라는 명목으로 ‘무과실 배상책임제’ 조항이 갑자기 관련법에 포함되면서 당초 규제 샌드박스 도입 취지가 무의미해질 위기에 처했다. ‘무과실 배상책임제’란 기업이 규제 샌드박스 속에서 혁신기술·상품·서비스를 제공하던 중 소비자가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면 고의·과실이 없더라도 무조건 배상해야 하는 내용이다.

이는 규제 샌드박스 도입에 맞춰 신사업 진출을 시도하려던 기술인재와 창업기업 의지를 꺾는 독소 조항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규제 완화 정책인 ‘규제 샌드박스’가 혁신성장·혁신창업을 막는 걸림돌 신세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오히려 산업·금융·IT 분야 혁신을 막는 또 다른 규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여당이 공론화 과정 없이 슬며시 무과실 배상책임 부분을 추가한 것도 문제다. 지난해 11월 발의된 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특별법 개정안에는 ‘고의 또는 과실이 없음을 입증한 경우 배상책임을 면제해준다’는 규정이 들어 있었다. 주무부처에서는 난색을 표시했지만 청와대와 여당이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에서는 청와대와 여당이 규제 완화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된다는 반응이다.

규제 샌드박스란 어린이가 다치지 않고 마음껏 놀 수 있는 모래통에서 유래된 단어로 혁신적인 기술·상품·서비스 등을 규제 없이 시험해보는 것을 뜻한다. 신산업, 신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제품, 서비스를 내놓을 때 일정 기간 기존의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시켜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영국에서 핀테크 산업 육성을 위해 처음 시작됐으며 문재인 정부에서도 핵심 규제개혁 중 하나로 채택했다.

외국에서는 규제 샌드박스에서 시범 도입되는 신기술과 상품·서비스에 어떤 위험 요인이 있는지를 자세히 밝히는 식으로 소비자를 보호한다. 새 상품·서비스 이용 가능 소비자 범위를 ‘관련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자’로 제한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4차 산업혁명위원회 첫 회의에서 혁신을 위한 규제 샌드박스 도입을 약속했다. 규제 샌드박스가 혁신성장의 디딤돌 역할을 하려면 사전 규제를 과감하게 없애고 문제가 생기면 사후에 조치를 취하는 네거티브 규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시범 도입되는 신기술이나 상품, 서비스에 대해서는 위험 요인을 소비자들에게 미리 알린다. 선진국 방식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일자리 창출에도 매우 중요하다. ‘무과실 배상책임제’ 조항으로 규제개혁의 실패나 효과를 퇴색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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