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봄이 오는 길목에 중국 황산과 우웬을 여행하면서 상하이 인근 도시인 자싱(嘉兴)에 들렀다. 그곳 여러 관광명소 가운데 한국인으로서는 반갑고 특별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김구 선생 피난처’이다. 5월말까지 도색 수리 중에 있는 매만가 76호, 2층 주택은 김구 선생이 일제의 눈을 피해 1932년 초여름부터 늦가을에 이르는 반년 가량 살았던 피난처로, 잠시 거주했던 곳이긴 하나 군데군데 백범 선생의 자취가 서려있고, 역사적 자료나 기념물이 보존돼 있는 곳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하던 김구 선생(1876~1949)은 일본의 추적이 심해지자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했다. 1919년 4월 11일 애국동지들과 함께 임시의정원을 구성해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으며, 그해 4월 1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서는 세계만방에 선포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사용됐으니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자랑스런 대한민국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임정에서 요직을 맡아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임정의 지시를 받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거행된 일본천황의 생일에 상하이사변 승전을 자랑하는 기념식장에서 일본군 육군대장 시라카와 등 군 수뇌부를 폭살하자 일본에서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임정 수뇌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휘몰아쳤다. 그 사정으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단속을 피해 상하이 인근지역으로 숨었던 것이다. 

그 검거 폭풍 속에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피난을 떠날 때에 당시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인 국민당 원로 츄푸청(褚輔成) 선생이 김구 선생과 가족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일제의 추적을 받고 있는 김구 선생 등 애국지사를 숨겨준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으나 츄 선생은 그의 양아들이 소유하고 있던 자싱의 매만가 주택지에 피난처를 마련해준 것은 항일투쟁의 협력자로서 동병상련에서이리라. 그에 대해 한국정부에서는 중국인이지만 고(故) 츄푸청 선생의 대한민국 독립 유공을 인정해 1996년 독립유공훈장을 추서해 고마움을 표시한 바 있다. 

호수를 끼고 있는 주택지, 김구 선생 피난처를 살피는 동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피난처는 중국 저장(浙江)성과 자싱시 인민정부에서 2000년에 시급 문물보호지역으로 지정한 데 이어, 전면 재정비해 2006년 5월에 성급 문물보호지역으로 선포하고 기념관으로 개관했던 것이다. 자싱엔 관광지가 여러 곳 있지만 주변 난후(南湖) 풍경이 아름답고, 또 상하이와 항저우와 가까운 거리라서 자싱을 찾는 한국여행객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일제 침략기에 애국민주투사로 유명한 츄푸청 선생의 기념관이 있어 츄 선생의 항일투쟁사를 볼 겸 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사시사철 많이 찾아들고 있어 자싱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이곳 피난처에서 김구 선생 등의 족적을 둘러보면서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국권을 빼앗기고 자유 없이 오랫동안 힘들게 살았던 한국과 중국 양국의 애환이 묻어 있고, 그 속에서 봄 새싹처럼 돋아나는 희망을 언뜻 느낄 수가 있었다. 또 고난의 세월을 인내하면서 오로지 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에 열중했던 한중 양국 국민들의 애국심과 깊은 우애가 고스란히 쌓인 증거가 저장성 자싱 인민정부가 지정하고 가꿔온 김구선생 피난처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김구 선생의 글 ‘백범일지’를 보면 1932년 여름, 자싱에서의 피난하던 일들이 나온다. ‘… 저씨 부인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 8월 불볕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활동사진기가 없는 당시 형편에서 어찌할 수 있으랴.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 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요.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여기서 저 부인은 위험과 고생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을 안전하게 피난시킨 츄푸청 선생의 맏며느리 주자루이(朱佳蕊, 주가예)를 말하는 것이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김구 선생이 자싱의 피난처로 옮길 때 츄푸청 선생과 아들 츄펑장, 며느리 주자루이에게 신세진 고마움이 가득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직에 올랐던 김구 선생을 향해 일제의 체포망이 조여오던 위급한 시기에 츄 선생과 그의 식구들은 일신상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김구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생활과 안전을 위해 헌신했으니 세월이 흐른 지금, 비록 그들은 없지만 현장을 보며 감사함을 새삼 느낀다.   

중국여행길에서 자싱에 들러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김구 선생의 족적을 보면서, 그가 실천했던 나라사랑이 얼마나 담대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여행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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