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선조임금(조선 14대) 때 동인세력의 영수인 이발(李潑)과 이길 형제는 문장이 뛰어나고 정치에서도 사정(邪正)의 기강확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었다.

그 시대에 그들 가문은 십대홍문(十代紅門)이라 존칭했다. 10대조로부터 한 대도 그르지 않고 문과에 급제한 그야말로 대단한 명문귀족이었다. 임금도 그들 가문에 대해서는 예를 표하며 공경했다.
 
이조좌랑인 이발은 동인의 영수로서 옳다고 판단되는 일은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겨 적을 많이 만들었다. 정여립과 친분이 두터운 그는 진보적 개혁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이발은 반대 당파인 정철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철이 서인의 영수로 전면에 나서면서 동인과의 대립 구도는 한층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당파 싸움은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점을 염려한 율곡과 서애 유성룡이 중재에 나섰다. 좋은 날을 택해 두 사람을 초청했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 이발과 정철의 화해를 종용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고성을 지르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중재하지 않으니만 못했다. 분위기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정철도 성질이 꽤나 급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먼저 뱉었다. 그 순간 두 사람 관계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발은 정여립이 임금의 미움을 받아 낙향한 뒤에도 서로 각별한 정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발은 그 서신들로 인하여 조작된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모진고문 끝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동인의 영수였던 십대홍문의 쟁쟁한 명문귀족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을 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앞뒤가 맞지 않은 사실이 있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동인들이 모조리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이 아쉬워 정여립과 결탁해 동인 자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역모를 했다는 것인지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주동자라고 하는 정여립이나 동조자 이발 형제와 동인 관련자 어느 누구도 역적질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인들의 조작 날조가 분명해 보이는 대목이다.

선조는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인세력을 배척해야 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는 정여립의 역모 고변이 올라오자 드디어 서인의 영수인 정철을 끌어들여 그들에게 어검(御劍)을 쥐어 주었다. 역모 사건이 일어나면 대부분 국왕이 친국을 하기 마련인데 그런 절차도 없이 정철의 일방적 수사 결과만으로 확정을 지었다.

서인들이 역모의 주동자라고 주장하는 정여립을 진안 현감에게 사주하여 발 빠르게 암살하고 자살로 조작했다. 그런 다음 마녀사냥식으로 낙점한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무차별로 척살시켰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이발과 이길 형제는 정철 앞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살점이 남은 것이 없었고, 80세 노모는 끌려가 압슬(壓膝)형을 당해 무릎이 으깨져 숨을 거두었고, 8살짜리 아들은 포승에 묶여 깨진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어 울부짖다가 죽었다. 조선시대의 사화 중 기축년에 일어난 사화가 제일 참혹했다고 한다.

이발이나 정철, 그들이 당대에 뛰어난 인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두 인재가 국가와 민중을 위해 양보하고 합심했더라면 애초에 임진왜란 같은 국가의 환란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조선의 당파들은 국가의 환란 중에도 기회만 있으면 서로 헐뜯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고, 우리 당이 아니면 무조건 거꾸러뜨려야 한다는 정치 논리가 그 때나 현실이나 아직 존재하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이발, 그가 좀 더 덕을 쌓고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은 정철에게 한 발 물러서는 원숙함을 보였더라면 무자비한 서인들에 의해 조상들이 일으켜 세운 찬란한 십대홍문의 명문귀족 가문이 자신의 대에서 멸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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