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김상헌 선생 글씨 (제공: 조성린 문학박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김상헌 선생 글씨 (제공: 조성린 문학박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중기 문신이자 청백리 중 한 사람인 김상헌 선생은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군수 김생해(金生海)이고 아버지는 돈녕부 도정(都正) 김극효(金克孝)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선조 23년(159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승문원 부정자(副正字: 경서 및 기타 문서 교정 업무)에 임명됐다.

광해군 6년(1613) 연안부사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발생했는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죽임을 당할 때 아들 김광찬이 김제남의 아들 김내의 사위라는 이유로 파직됐다. 이후 김상헌은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했다.

인조반정(1623) 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했고,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됐다.

1635년 대사헌이 되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다. 임금이 남한산성을 나가기로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다.

이를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임금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 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하고는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삼전도에서 항복할 때는 인조를 따라가지 않고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으로 들어갔다.

김상헌의 올곧은 정신은 하나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고서인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일찍이 장약관(의약에 관한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 박시량이 조회에 참석하고자 입궐하는데 땅이 너무 질척질척해 신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대분투(덧신)를 신고 입궐했다. 대분투는 나라에서 법으로 금하던 것이었기에 대사헌으로 있던 김상헌이 이 사람을 잡아다가 죄인으로 다스리려고 했다.

박시량은 어려서 추탄 오윤겸에게 글을 배웠는데 오윤겸과 김상헌은 매우 절친한 사이었다. 박시량의 처가 이런 관계를 알고서 오윤겸을 통해 남편의 죄를 면해줄 것을김상헌에게 청하도록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오윤겸이 말하기를 “김상헌은 내 아들이 법을 어겨 벌을 받아도 절대로 봐 주지 않을 사람인데 하물며 남의 부탁으로 청탁을 한다면 봐 주겠는가”하면서 불쌍히 생각하면서도 응해주지 않았다.

정리: 장수경 기자
도움말: 문학박사 조성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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