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직급을 조선시대에는 감사(監司)라고 했다. 순상(巡相) 혹은 합하(閤下), 또는 도백(道伯)이라고 불렸다. 감사는 임금을 대신해 지방 장관으로서 군사와 행정을 지휘 통제했으므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다산 정약용이 쓴 글에 당시 감사들의 행차를 기록한 내용이 있다.

“…(전략)… 감사는 쌍마가 끄는 교자(轎子)를 타고 옥로(玉鷺)가 달린 모자를 쓴다. 부(府) 2명, 사(史) 2명, 서(胥) 6명, 도(徒) 수십명, 하인과 심부름꾼과 졸복의 무리가 수십 수백 명이다. …기마(騎馬)가 100필, 복마(卜馬)가 100필,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예쁘게 화장한 부인이 수십명이 그 뒤를 따른다. 화살을 짊어진 행렬의 맨 앞에 서는 비장(裨將)이 2명, 맨 뒤에 가는 사람이 3명, 따라가는 역관(驛館)이 1명, 말 타고 따라가는 향정관(鄕亭官)이 3명, 부신(符信) 주머니를 차고 끈을 늘어뜨린 채 숨을 죽이면서 말 타고 따라가는 사람이 4, 5명이다. (하략)…” (다산논총 ‘감사론’)

사대부라면 한번쯤은 폼나게 살 수 있었던 감사로 나가기를 원했다. 중앙 요직에 기용되려면 감사를 거쳐야 했다. 역사에 기록된 명인들을 보면 대부분 감사를 지낸 이들이 많다. 

세종 때 정인지는 고려사를 찬술한 분이다.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해 남원의 유명한 광한루를 지었다. 본래 광통루라 한 것을 월궁(月宮)에 비유해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고 했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고전 춘향전의 배경을 만들게 했다. 

감사들은 임기가 2년이었다. 그런데 특별히 관기들과의 염문이 많았다. 송강 정철이 전주감영을 벗어나 남원 광한루를 자주 찾아가 명기 강아와 풍류를 벗 삼은 것은 유명한 일화로 회자된다. 

엄정한 처리로 유명했던 암행어사 박문수도 황해도 감사를 지냈는데 설화에 두 여인이 등장한다. 하나는 절세의 미인이었고 또 하나는 박색의 여인이었다. 박문수는 나중에 거지행색으로 두 여인을 시험해 자신을 받아들인 못생긴 여인을 배필로 선택했다.  

숙종 때 충청감사 한지(韓祉)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관아에 기생들이 득실거렸어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쓰러졌는데 깨어보니 옆에 기생이 누어있었다. 관아 서리들이 감사를 모시라고 들여보낸 것이었다. 한지는 이불 속에 들어온 기생을 내쫓지는 않았으나 얘기만을 나누며 밤을 보냈다고 한다. 

한지는 법을 엄격히 적용해 관아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서도 기생들을 외면했으며 청렴결백하여 존경을 받았다. 조선시대 충청도 감영은 시대에 따라 청주, 충주, 공주, 홍성에도 있었다. 그래서 공홍도, 충공도, 혹은 홍공도라고도 불렀다. 지역의 머리글자를 따라 호칭한 것이다. 충청도란 충주와 청주를 뜻한다. 조선 태종 때 서선(徐選), 세종 대에 최순(崔洵), 세조 때 이승소(李承召) 등은 왕조실록에 등재된 명 충청감사였다. 임금은 시를 잘 지은 이승소를 총애했는데 병이 나자 보약까지 하사했다. 

선조 대에 충청관찰사 서경(西坰) 유근(柳根)은 송강 정철과도 절친했으며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고향 괴산 괴강으로 돌아와 고산정(孤山亭)을 짓고 글만을 읽으며 살았다. 백제 역사에도 관심이 커 천안 직산에 온조묘(溫祚廟)를 세울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대권 가도에서 유력한 인물로 떠올랐던 안희정 충남지사가 미투로 추락했다. 단호한 언변과 열정적인 자세로 많은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여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홍성에 있는 지사 공관으로 정무비서를 불러 상처를 주었다고 한다. 지사는 위세를 부리고 욕심을 채우는 자리가 아니다. 충청감사였던 한지(韓祉)처럼 엄정한 자기관리와 위민적 직분을 배웠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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