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유목근성(遊牧根性)
[고전 속 정치이야기] 유목근성(遊牧根性)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AD 1294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죽기 전에 태자 진금이 먼저 죽었다. 중신 바얀은 진금의 셋째 아들 테무얼을 옹립했다. 그가 성종이다. 그 무렵까지 태종 오고타이의 손자 하이투는 살아있었다. AD 1301년, 하이투는 성종이 파견한 하이샨에게 패하고 사망했다. 성종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좌승상 아쿠타이가 쿠빌라이의 손자 아난타이를 보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막북에 있던 하이샨이 돌아와 아쿠타이와 아난타이를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그가 무종이다. 제국은 50년 만에 다시 통일됐다. 무종이 죽고 그의 아우 발라파다가 즉위했다. 그가 인종이다. 인종은 무종의 아들에게 전위를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승상 테무달라의 건의로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무종의 구신들이 반발했지만 실패하자 차카타이한국으로 도망쳤다. AD 1320년, 인종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다. 그가 영종이다. AD 1325년, 영종이 신하에게 피살되자, 종친들은 북쪽 변경에 있던 성종의 조카 에센테무르를 영입했다. 그가 태정제이다. AD 1328년, 태정제가 죽고 9세에 불과했던 아소지빠가 즉위했다. 

AD 1294년 성종이 즉위했을 때부터 AD 1333년 마지막 황제 순제가 즉위할 때까지 약 40년 동안 모두 10명의 황제가 교체됐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은 황위계승과 관련된 분규가 발생했으며, 대부분의 분쟁은 신하들이 일으켰다. 이는 오랜 중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특이한 현상이었다. 신하가 황위계승에 개입하자 공을 세운 권신들이 권력을 전횡한 것은 당연했다. 인종 시대의 테무지르, 문종 시대의 옌테무르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원의 정치는 정상적이지 못했다.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된 원인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황위계승제도가 건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국이 불안했으며, 그 기회를 이용해 권신들이 권력을 전횡하게 되자 정치적 위기가 가중됐다. 둘째, 농업사회인 중원을 지배하게 된 군주가 거기에 적합한 제왕으로서의 교육을 받지 못해 최고권력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족 특유의 소박하고 강건한 기풍을 잃고 탐욕과 향락에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군주는 농업국가의 구조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회계전문가에 의존해 백성들을 수탈하기에 급급했다. 셋째, 과도한 종족 차별정책으로 한족을 압박했지만, 취약한 행정조직으로 수많은 한족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불만을 품은 한족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제대로 수습을 하지 못해 혼란기 가속화됐다. 넷째, 라마교를 지나치게 신봉해 막대한 재정을 낭비했으며, 라마승들의 교만과 불법자행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실정의 근본적인 원인은 유목민족인 몽고족의 민족성에 있었다. 뛰어난 기동력과 전투력으로 전쟁을 통한 정복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그들은 정착민을 통치하게 되자 정치적, 행정적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보수성이 강하고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한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차별정책으로 그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격렬한 반발에 부딪치고 말았다. 몽고족은 AD 1206년, 테무진이 대한을 칭한 이래 3차례의 서방원정을 통해 4개의 한국을 세우고, AD 1279년,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키기까지 74년 동안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남송을 멸망시킨 후 불과 90년 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마상득지(馬上得之), 마상불치(馬上不治)’ 즉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통치를 하지는 못한다는 역사적 경험과 지혜를 깨닫지 못한 결과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