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새해 들어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적폐청산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종 사건사고 발생과 함께 정치권의 이합집산 등으로 우리 사회는 꽤나 시끄러웠다. 하기야 선거가 있는 해가 닥쳐왔으니 조용할 리가 없다. 각 당이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새 판을 짜고 사회적 이슈를 선점해 국민의 지지를 얻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난해 대선 때 정권을 잃고만 자유한국당에서는 거듭되는 국민여론 지지세 침체기를 어떻게 탈출하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때마침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반전을 시도했다. ‘천안함 폭침’의 주역인 김 부위원장의 방남 활동을 두고서 반공이념에 불붙이는 정쟁(政爭)은 계속됐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 땅에 3월이 찾아들었다.

엊그제 우리 역사 중 하나의 현장이기도 한 옛 서대문형무소에서 있은 3.1절 99주년 기념행사를 TV 앞에서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게 많았다. 나라 잃은 아픔을 우리 선조들이 통탄하면서도 구국 활동을 이어간 애국심을 엿볼 수 있었다. 일제로부터의 광복은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펼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이 큰 힘을 보탰지만 밖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국내에서 2천만 동포들이 각성하고 단결한 힘으로 일궈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에, 나라안팎이 어려운 현 상황에서 무엇보다 국가 존립과 국민 안녕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납니다’라는 노래처럼 3월이 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기미년 독립만세 사건이요, 3.1절이다. 해마다 이날이면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정부에서는 시민단체, 국민과 함께 기념행사하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곤 하는데 그 근본은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사랑하는 마음인 것이다.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거행됐던 일제 항거 독립운동 만세사건은 그 후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후일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지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3.1만세운동을 생각하다보니 역사적 사실을 한가지 덧붙일 게 있다. 일제 치하에서 구국 애국활동을 했던 경상도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필자의 고향분이다보니 어려서부터 그와 관련된 전설적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어린 시절 오십천이 흐르는 모퉁이 작은 동산에 세워져있던 신돌석장군기념비를 보면서 그 분의 뛰어난 활약상을 새기고 기려왔던 것이다. 또 기미년 당시 영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 상술해본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탑골공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이후 전국적인 독립운동 3대 만세사건이 있었으니 경북 영해 의거, 충남 천안 아우내 의거, 경기 화성의 제암리 의거다.  

1919년 3월 18일 영해장터에 모인 주민 2천여명이 사전에 만든 태극기로 극렬하게 독립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일본 진압군에 의해 선량한 주민 8명이 순직했고, 19명이 부상당했으며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주동자 196명이 재판에 회부돼 이 가운데 18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와 같은 영해 장터 만세 의거는 3.1만세운동 이후 한강 이남에서 수천명이 모여 의거를 감행했던 최초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영덕에서는 해마다 3월 18일이 되면 군민들이 영해장터에 모여 그날의 값진 의거를 재현하면서 나라사랑을 일깨우고 있다.   

그 다음 3.1운동의 맥은 충남 천안의 아우내장터 만세 의거로 나타났다. 천안지역에서 만세운동이 태동되면서 서울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유관순 열사가 일본 헌병대의 눈을 피해 고향인 천안 병천으로 내려와 또 다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3천명의 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유관순 열사가 비장한 결의로 군중 앞에서 연설하면서 대한독립만세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만세 의거에 참가한 주민 19명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목숨을 잃는 등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는 극렬했고, 이 의거는 유관순 열사로 인해 더 유명해졌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만세사건이 벌어졌다. 일제 경찰은 1919년 4월 15일 오후에 만세 의거에 참여했던 신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한 후 불을 지르고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니 이로 인해 23명의 귀중한 목숨이 희생됐다. 화재로 소실된 제암리교회는 광복되고 25년이 더 지난 1970년에 이르러서야 새 교회가 건립됐고, 1983년 7월에 새 기념탑이 세워져 그 날의 값진 만세운동 의거를 역사의 현장으로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3.1만세운동은 광복의 계기로서 의의가 크다. 당시 우리 동포들의 애국심 발로는 곧 해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국내에서는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처럼 여야 정치권이 한치 양보 없이 정쟁으로 치닫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99년 전 민족혼을 달구었던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다시 되새겨본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번영과 국민단합이 최우선이라는 시대적 교훈이 광복의 투영으로 현실을 비쳐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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