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에 명성을 날린 서정시인 고(故) 백석(1912~1996)의 로망을 그린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상대는 기생이었다. 시인은 자야라는 기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만 덥석 손을 잡았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실지로 백석은 ‘나타샤’라는 기생을 사랑했으며 그녀의 이름을 딴 시가 남아있다. 

유교사회에서 남자가 여인의 손목을 잡는다는 것은 상대를 책임지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고전 춘향가에서 춘향은 이도령에게 손목을 잡히자 그를 낭군으로 점찍었다. 그런데 춘향은 밤중에 담장을 넘어 온 이도령의 손을 먼저 잡고는 방으로 안내한다.   

조선 중종 때 동주 성제원은 친구가 충청감사로 있는 청주 감영에 놀러갔다. 명산 속리산을 주유하기 위해 잠깐 들른 것인데 감사는 올곧은 동주를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아름다운 기생을 딸려 보냈다. 

동주는 기생을 데리고 여러 날이 걸리는 속리산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주막에서 혹은 숲속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그런데 동주는 기생에게 지필묵을 꺼내 먹을 갈게 하고 시만을 읊었다. 기생이 온갖 고혹적인 자태로 유혹했지만 동주는 끝내 손목을 잡지 않았다. 

속리산 여행이 다 끝나는 날 동주는 기생에게 그동안 써놓은 글을 주며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생은 이별하는 날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친구 청주목사는 동주의 초연함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축첩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조선시기에도 선비들은 기생과의 염문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것이 후에 정적들의 성토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은 문호로서 당대 최고였으면서도 여성들과의 로맨스가 출세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전라감사 시절 송강은 남원기생 강아(江娥)를 사랑했다. 그녀가 강아로 불린 것은 송강이 자신의 아호 ‘강(江)’에 기생의 이름 ‘아(娥)’를 합친 것이다. 송강은 중요한 직책을 제수 받을 때마다 여성편력이 입줄에 오르내렸다. 그를 추천한 율곡 이이까지 상대당의 성토대상이 됐다는 일화가 전한다. 

조선조 성종 때 최고의 스캔들은 어우동 사건이다. 본래 양반 출신이었던 어우동은 추문으로 집에서 쫓겨나자 많은 사대부들과 자유분방하게 교제하며 살았다. 이때 어우동의 손목을 잡은 서울 장안의 내로라하는 왕족, 고관대작, 지식인들이 줄줄이 망신살에 빠졌다. 

이 사건에 관련된 고관 가운데는 여러 판서를 역임했던 어유소(魚有沼)도 있었다. 임금의 피붙이인 여러 명의 종친(宗親)들도 포함됐다. 이들은 사헌부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어우동이 먼저 유혹해 손목을 잡혔다고 발뺌했다. 고관들은 한동안 서울장안에 얼굴을 들고 나가지 못했지만 어우동은 극형에 처해졌다. 

광해군 당시 홍길동전을 지은 이단아 허균은 자유로운 성관을 지니고 있었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남녀유별은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나는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린 본성은 어길 수 없다.” 

허균은 전라도 부안까지 내려가 친구의 연인이었던 당대 명기 매창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절의가 있던 매창은 허균의 손목을 뿌리친다. 당시 반대당 사람들은 허균을 경망스럽다고 비하했으며 나중에 역모에 관련돼 참형 당했을 때는 광해군마저 ‘행실도 부끄럼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지나친 여성편력도 파멸을 재촉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미투’ 신드롬이 거세다. 연극계 한 원로 연출자의 성폭력 사건은 파문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한국을 대표했던 문단의 원로 시인은 오래 전에 젊은 후배들의 손목을 잡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 있다. 고금 손목에 얽힌 행·불행 고사가 생각나 적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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