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뉴스천지)

김동희 건축가
요즈음에는 세월이 좀 천천히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때는 지지리도 가지 않는 시간이 내 마음도 몰라준다 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기대했던 그 시절은 절대 오지 않고 나이가 들어가며 늘어나는 것은 걱정뿐이다. 

마음은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부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나잇살이라 불리는 뱃살이 나오면서 전체의 비례가 듬직해진다. 나잇살은 늘어났지만 여기저기 찾아다닐 힘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어린 시절처럼 누군가 희야- 하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도 해보았다.  

시간과 나이에 맞게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건축사는 나이가 들수록 장인이 되는 느낌이다. 의사가 명의가 되듯이 건축사도 노하우가 쌓이면 명장이 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필요한 덧살들이 사라지고 아주 실용적인 뼈대와 근육만 남게 된다.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해보지 않은 것들을 경험해보려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이 당연한 욕심이었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하나하나의 매듭들을 훌륭하게 마무리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묵직하고 편안해 누구나 편히 들르는 공간이 된다면 좋겠다. 

그러나 일이라는 것이 갑자기 완성되는 법은 없다. 잘 되는 일들은 이리 부딪히고 저리 처박히며 깎이고 닳아 자리를 잡는 법이다. 특히 완성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건축은 더욱더 그러하다.

일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한없이 기다릴 수도 있다. 불안하고 성급한 마음은 일을 그르치게 하기 십상이다. 세상의 모든 건축인들이 훌륭한 건축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건축에 필요한 시간을 모두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어떤 경우에는 경제성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누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쪼그라든 마음은 상상력마저 조심스럽게 만든다. 조심스러운 상상력은 진부하고 시시한 예측에 머무를 뿐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은 이제 점점 쇠할 것만 같았지만 해를 거듭해도 머리를 관통하는 듯한 명쾌하고 놀라운 구상을 쏟아내고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고 버틴 덕택으로 얻은 사고의 풍만함이 상상력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사고의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게 한다. 

어려서 이루지 못한 즐거움을 경험이 축적된 시간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맘껏 누릴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의 물성과 상상력이 잘 어우러져서 빚어지는 건축은 걸작이 될 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무리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물고기의 배가 충분히 차고 살이 차오르기를 기다려야 훌륭한 식단을 준비할 수 있듯, 건축이 완성되는 시간을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기 위해 자리를 잡으면 될 것 같다.

벌써 따뜻한 봄날이 오는 입학시즌이다. 배부른 상상을 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 다시 왔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