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숙녀 시인 한민족독도사관 관장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만세일계(萬歲一繼)의 천황혈통의 기록은 712년과 720년에 각각 편찬된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두 역사서에 근거를 하고 있다. 두 책에는 ‘천황가문은 서기전 660년 건국한 1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온 혈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8세기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될 당시의 일본은 그때까지만 해도 100년 정도 집권하여 온 일본왕가가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역력하던 시절이었다. 이때까지도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체계적인 기록을 남길 만할 만큼 문자에 능한 역사가들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된 사서가 있었으나 당시 내전의 전란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다. 최근 학계에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자들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한을 품은 유민들이었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당시 기록자의 생각에 머무르며 조작되어 있는 일본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내용들의 탄생 그 자체부터가 진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불손한 상황 하에 있었다. 그 예로 1대의 왕이 100년을 넘게 통치한 것처럼 시간의 늘림으로 거슬러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서기’는 기록을 요구한 통치자의 구미에 알맞게 접근한 모습이 역력하다. 주로 역사는 승자에 의하여 기록되고 전승됨으로 승자의 편협한 시각으로 포장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승자의 정당성을 노출하기 위한 부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왕가를 만세일계(萬歲一繼)로 내세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진실성이 없다. 또 그것을 근거로 활용하는 일본학계나 국민들의 태도는 더욱 가치가 없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자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후 재기의 꿈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한반도의 상황과 일본의 상황들을 당시 권력이 원하는 방향과 내용으로 채워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통치자의 구미에 맞춘 흔적들로 가득하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초기 가야인과 초기 백제인들이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때 부여인들이 일본열도를 점령하자 신·구세력의 대타협이 이루어진다. 이것을 지극히 일본식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조작하여 온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일본 천황 천조대신과 태풍의 남신(男神) 스사노오노 미코도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은, 당시 한반도에서 유입된 신·구세력 간의 동질성에서 오는 대타협이었던 것이다.

일본열도는 고구려 후손과 발해의 유민들까지 차례차례 합류하여 그야말로 한반도의 민족성을 그대로 혼합하고 있다. 과거시간 태양을 숭배하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해 떠오르는 낙원을 찾아 영원한 삶을 갈구하며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살아왔다. 그 흔적들이 암각화 등 유물들과 함께 저마다 그 시대의 주인들을 자세하게 일러주며 숨길 수 없는 진정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일본의 이즈모·규슈·야마토 지역이 한인 정착지였던 사실을 숨기려던 일본 사학계 학자들과 정치관계인들은 출토되는 한반도 관련 유물들로 인하여 매우 당황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국가의 탄생 측면에서 숨길 수 없는 영원한 사실들이다.

역사는 오랜 세월 덮어 둘 수는 있어도 역사가의 눈은 잠시도 가릴 수가 없다. 일본의 ‘정창원’에 보관된 유물들을 떳떳하게 공개하는 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닌도쿠’ 왕릉을 세계고고학자들과 함께 발굴 공개하지 못함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것인가?

또 태풍에 휩쓸린 ‘닌도쿠’ 왕릉 내부를 들여다본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쿠(須田龍作) 일본사 교수의 증언을 기어코 가져오지 않더라도, 발굴이 두려우면 역사의 진실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라! 일본은 그동안 조작된 역사를 들이대며 우리의 독도를 탐하고 있다. 거짓으로 역사를 포장하려고 하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역사의 거대한 회귀본능을 감히 막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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