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북(北)의 비핵화를 놓고 벌어진 싸움에서 미국과 북한은 거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더는 피할 곳도 물러날 곳도 없다. 미국은 쫓고 북은 쫓기다 숨이 막혀 질식할 지경이다. 평창동계올림픽에 그들이 기꺼이 성의를 다해 참여한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南)에 기대어 숨통을 트기 위함이었다고 봐진다. 하지만 그것은 급할 때 지푸라기에도 매달리는 그들만의 환상이었음을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깨닫게 해준 계기가 돼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북 정권의 실세들인 김정은의 친동생 김여정과 노동당 부위원장 김영철 등이 방남(訪南)을 통해 그들의 핵무력 완성이 결코 그들의 맘대로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우리 당국자들의 열린 설명을 통해 그들은 그들이 허망하게도 핵 무력 완성의 성공을 믿는 일종의 ‘도그마(dogma)’와 동굴의 우상과 같은 집단정신에 세뇌돼 있었다는 것을 얼마간이라도 깨달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물론 전혀 아닐 수도 있는 개연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우리 당국자들의 노력이 그런 곳에 집중됐을 것이라고 볼 심증은 충분하다.      

평창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하고 돌아간 김영철의 깜깜이 행적에 대해 말이 많다. 그렇지만 설마 우리 당국자들이 애초에 그의 방남에 거부 반응을 보인 국민들의 세금으로, 그를 공짜 밥을 먹이고 공짜 잠을 재워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영철이 그들의 독단적 주장으로 우리를 설득하려 애썼을 것이 뻔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으로 그들의 비핵화가 왜 절실한가를 객관적이고 균형감 있으며 열린 시각으로 한 수 가르쳐 주려 애썼을 것이 틀림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막연하고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남북 관계 개선은 물론 미국과 대화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꼬리를 감춘 채 돌아갔다. 

물론 비핵화라는 말이 빠져 성이 차지 않는다. 이래서 물도 아니고 막걸리도 아닌 발언이 돼버리고 말았다. 아마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수위(水位)의 발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비핵화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이 발언이 북의 비핵화를 바라는 세계의 여망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인가는 그의 방남 직후 나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코멘트(comment)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북대화는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만(only the right condition)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그의 이런 발언은 역대 미국 정권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루어진 것으로서 과거와 확실히 차별화되며 굳건한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트럼프는 최근 백악관에서 열린 주지시 연례 접견 행사에서 ‘북한이 대화를 원하고 있지만 우리는 적절한 조건에서만 대화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에 매우 강경하게 해왔다. 북한이 처음으로 대화를 원하고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보자는 것이 내 입장’이라 덧붙였다. 두말할 것 없이 김영철의 북한식 맹탕 대화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다. 더구나 트럼프는 대북 군사적 옵션(option)까지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의 발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비핵화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북과의 대화를 위한 대화나 어물정한 대화로서 북에 핵기술 고도화를 위한 시간이나 벌어주는 우매한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거 25년간의 실패를 일일이 열거했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들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했다.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도 기자회견을 통해 ‘앞으로 논의될 어떤 대화도 북한이 한반도의 비핵화에 동의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며 이게 우리가 어떤 대화를 할지말지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라고 트럼프의 발언을 뒷받침했다.   

이렇다면 볼은 북한으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미북대화를 주선하려고 하는 우리에게도 숙제가 주어졌다. 외교에는 물밑협상과 막뒤접촉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 나가야 하는 부분과 공개해야 할 부분은 미국이 공언하고 있는 이런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트럼프가 재임하는 한 북이 과거와 같이 미국을 속이기 어려워졌다. 이 점에서 북은 임자(counterpart)를 잘못 만났다.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비핵화 협상의 로드맵(road map)이 대충 핵동결에서 시작해 핵 폐기의 진행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완전 폐기에 이르는 것으로 돼있어 보이나 강경한 미국의 입장에 비추어 현실성이 약하다. 

왜냐하면 미국에 북의 습성으로 보아 얼마를 끌지 모를 협상 기간을 견디어 낼 인내심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더욱이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대화의 입구에서부터 확실한 북의 비핵화의지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철의 맹탕 발언을 통해 드러난 북의 의도는 핵 보유를 묵인 받는 핵동결인 것을 숨길 수 없는 것이어서 도저히 우리나 미국이나 유엔과 세계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북은 이미 김영철이 돌아 간 후 관영매체를 통해 핵 포기는 있을 수 없음을 재천명하고 미국과 대화도 그들의 일방적인 핵 폐기가 아니라 핵보유국끼리의 동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밝혀놓았다. 

이렇게 되면 미북대화는 이루어진다 해도 시작부터 질척거려 순탄할 수가 없으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 항상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더구나 위기의 절정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그들이 핵보유국이 되려는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으려는 우리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이 오히려 우리를 어려운 입장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북의 선택에 달렸다. 우리의 숙제는 그런 북을 한미 동맹의 정신과 세계의 여망에 부합하는 비핵화의 의지에 토대해 설득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를 이루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절박한 과제이며 민족적·역사적·시대적인 숙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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