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후한의 광무제 유수(劉秀)는 유학자로 유가의 핵심이념인 기(氣)와 절(節)을 중시했다. 역대 황제들도 명분과 절조를 중시하자, 사대부는 효도, 사양, 청렴, 보은과 같은 덕목을 지키는 것을 자랑했다.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재야에서 정치를 비판할 수 있었다. 수도 낙양에서 태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비판을 ‘청의(淸議)’라고 했다. 전한에서 이어진 장구(章句)와 훈고(訓詁)학은 태학생들의 지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현실정치와 사회문제에 집중됐다. 조정 관료들도 그들의 비판을 후원했다. 태학생들은 외척과 환관이 자신의 출사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3만명이 넘는 태학생의 ‘청의’가 정치에 힘을 가하게 되자 비판의 대상인 세력도 긴장했다. 싸움은 외척과 관료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환제는 환관의 도움으로 외척을 제거했다. 환관이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대두됐다. 사대부는 싸움의 파트너를 환관으로 교체했다. 혈연보다 약한 총애를 배경으로 하는 환관들과 이념을 무기로 하는 사대부들의 싸움은 호각을 이루며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것이 1차 당고지화이다.

사례교위 이응(李膺), 태위 진번(陳蕃), 왕창(王暢)이 태학생을 이용해 환관의 정치개입을 비판하고, 환관 장량의 아우 장삭(張朔)과 무뢰배 장성(張成)을 처형하면서 시작된 첫 번째 싸움은 외척의 중재로 이응을 비롯한 200여명이 종신금고형을 받으면서 마무리됐다. 환제가 죽자 두태후가 12세인 유굉(劉宏)을 영제로 옹립하고 오빠 두무를 대장군, 진번을 태부로 삼아 국정을 위임했다. 두무와 진번은 이응과 두밀도 다시 임용했다. 외척과 사대부가 연대해 환관과 대립했다. 두무와 진번은 환관을 제거하려다가 역공을 받아 피살됐다. 조정 신하들은 대부분 면직됐다. 이듬해 환관들은 관련자들을 색출해 700여명을 살해했다. 사대부들은 황건의 난이 발생했을 때까지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것이 2차 당고지화이다.

2차례 정치투쟁에서 환관이 모두 이겼다. 태학생이 주도하던 비판여론도 사라졌다. 환관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았다. 중상시 여강은 국가의 대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건의 난이 발생하자, 그는 당인들이 장각과 결탁할 가능성을 전제로 그들을 다시 기용하라고 건의했다. 사대부들이 재기용됐지만, 여강은 동료 환관들과 충돌했다. 여강은 동료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영제는 궁중에 시장을 열고 전당포 주인 노릇을 하고 놀았다. 공개적으로 관직을 팔아서 돈을 벌었으며,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외상으로 관직을 팔기도 했다. 여강은 그러한 황제를 비판했다. 황제가 정신을 차리고 영단을 내리면 환관들은 권력을 잃게 된다. 여강이 관료제도를 정상화하라고 건의한 배경에는 환관세력을 약화시킨다는 의미가 있었다.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결국 여강을 죽이고 말았다. 진정한 용기와 정의는 자기 진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어야 한다. 여강은 환관이었지만 동료들의 불의에 동참하지 않았다. 국가의 위기를 본 그는 궁정내부투쟁에는 능하지만 환관이 반란을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고의 화로 축출된 사대부와 관료들이 반란세력을 변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어지러운 시대에 국가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가장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결국은 자기 진영에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으면서 후한에서 황실을 위해 진심으로 충고하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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