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단조로운 무대 미장센, 극의 매력 더해

주인공 외 캐릭터 존재감 약해 아쉬워

[천지일보=이혜림·지승연 기자]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았을 뿐입니다.”

지난 2005년 순진한 시골 총각 연기로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황정민이 남긴 겸손의 말이다. 그는 이후 정의감 넘치는 특수 강력사건 담당 광역수사대원이 되고, 성공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악덕 시장이 되기도 했으며 무속인이 되기도 했다. 뛰어난 집중력과 몰입으로 어느 배역에나 동화되는 배우 황정민이 이번에는 비틀린 악인 ‘리차드3세’로 분했다.

연극의 배경인 1400년대 영국은 요크·랭거스터 두 가문의 왕권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때다. 전쟁에서 승리한 요크 가문은 첫째 ‘에드워드 4세’를 왕위에 올린다. 모두가 승리를 축하하는 가운데 요크 가의 셋째는 불만을 품는다. 그는 가문을 위해 온 몸을 던졌으나, 말라비틀어진 몸과 추한 얼굴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추앙받기보다 무시·외면을 당한다.

하지만 뛰어난 언변과 권모술수, 탁월한 리더십, 유머 감각을 지닌 그는 열등감을 왕권에 대한 야욕으로 바꾸고 악인이 되길 자처한다. 자신의 집권에 방해되는 인물을 하나둘 해치운 그는 결국 ‘리차드3세’로 즉위한다.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연극 ‘리차드3세’는 셰익스피어의 동명의 소설로부터 탄생했다. 셰익스피어는 1455년 영국 장미전쟁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품을 집필했고 흰 장미로 대변되는 요크 가문과 붉은 장미의 랭거스터 가문 사람들에 극적 요소를 넣어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역사 속 실제 인물과 작품 속 캐릭터 사이에 간극이 생겼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됐다.

연극의 주인공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리차드3세다. 모든 배역은 원캐스트로, 10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한 배우 황정민이 타이틀 롤을 꿰찼다.

이야기 속 리차드3세는 왕관을 쓸 때까지, 그리고 쓰고 난 후에도 막강한 힘을 가진 경쟁자들을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배우 황정민은 “무대 위 왕은 오직 나 한명”이라고 외치는 듯 객석을 군림했다. 작품은 그야말로 황정민을 왜 ‘믿고 보는 배우’라고 하지는 이해시켜주는 연극이었다.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황정민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화자(話者)가 돼 관객을 향해 내레이션하기도 하며 자유자재로 연기에 변화를 준다. 그는 어느 대사 하나 흘려서 발음하지 않고, 호흡이 찰 만한 긴 대사를 할 때도 정확한 발음을 구사해 관객의 귀에 단어를 하나하나 꽂아 넣는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공연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것도 황정민의 몫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말투와 익살스러운 대사를 구사하며 관객의 실소(失笑)를 유발한다.

무엇보다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그의 꼽추연기는 경이로움까지 불러일으킨다. 황정민은 100분의 공연시간 내내 허리를 구부정히 숙여 자세를 유지하고, 뒤틀린 왼쪽 팔과 서로 달라붙은 손가락을 표현하며 많은 양의 대사를 소화한다. 100분 내내 신체가 뒤틀린 리차드3세로 무대 위에 있던 그는 커튼콜에서야 온몸을 쫙 피고 황정민으로 돌아온다.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단조로운 무대 연출은 관객의 시선 분산을 최소화해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또 리처드 3세의 몸처럼 기울게 설치된 스크린과 극 후반에 드러나는 스크린 뒤 공간, 28m 깊이로 가라앉는 무대 등은 리차드3세의 인생을 시각화해 극의 매력을 더한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리차드3세의 주변 인물들은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저항한번 못해보고 리처드의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다. 주인공 외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반격을 보는 묘미가 떨어져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정웅인, 김여진 등 연기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를 볼 수 없어 맥이 빠진다. 그나마 연극에서 뮤지컬의 향기를 느끼게 해준 ‘앤’ 역의 박지연과, 우리나라 고유의 창을 활용한 대사를 선보이는 ‘마가렛 왕비’ 역의 소리꾼 정은혜의 연기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연극 ‘리차드3세’ 공연사진.(제공: 샘컴퍼니)ⓒ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6

리차드3세는 왕좌에 오른 후에도 “나 왕관을 꿈꾼다”고 외치며 영원·유일한 권력을 갈망한다. 그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하지만, 리차드3세의 일생은 역할을 맡은 황정민의 연기 덕분에 관객 마음에 깊은 잔상으로 남는다. 연극은 오는 3월 4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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