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인구 5만 3천여명, 군세가 열악한 마늘고장 의성군 낭자들이 기적을 만들었다. 세계 최강 컬링 국가 대표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결승전에서 스웨덴과 싸워 은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아시아 컬링사상 처음이었으며 국민들은 선수들에게 잘 싸웠다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미국의 주요 방송은 물론 세계 언론들이 의성 낭자군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팀킴’이라는 애칭으로 동계올림픽 사상 세계가 이렇게 열광한 적은 없다.

의성 낭자들은 모두 고교 동창생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 집념으로 일군 은메달이어서 백배의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이 바쁜 부모들을 도와주며 운동을 한 김은정 선수의 스토리는 더욱 감동적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비인기 종목을 개척하여 고난과 땀으로 일군 인간승리다.

의성 낭자군의 카리스마와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재미있게도 의성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민속 가운데 우먼파워가 넘치는 놀이들이 많다. ‘의성 기와 밟기’의 기원을 보면 고려 말 홍건적 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민왕이 공주와 왕족들을 데리고 이 지방으로 피난을 왔다. 그런데 물이 불어 하천을 건널 수 없었다. 이때 마을 소녀들이 나와 등을 굽히고 공주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 놀이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마을 부녀자들이 주인공들이다. 남·북촌 부인들이 모두 나와 두 패로 편을 갈라  내기를 한다. 맨 앞에는 건장한 여자 네 명이 우물 정(井)자로 잡고 기둥을 만든다. 처음에는 몸이 가벼운 처녀가 공주 노릇을 하는데 나중에는 건장한 여자로 교체돼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먼저 공주를 ‘가꽃게’라 하고 바꾸어 태운 여장부를 ‘진꽃게’라 한다. 또 이 놀이가 벌어지는 주변에는 남성들이 주축을 이룬 풍물패가 연주하면서 흥을 돋아주는 것이 이색적이다.  

의성 대곡사 화전놀이도 의성 여성들의 적극성을 대변하는 전통놀이다. 이른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따 쌀가루에 반죽해 전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 풍속에서 비롯됐다. 
‘재화 재화 재화화, 얼씨구 절씨구 좋을시고, 춘삼월 화전놀이를 간다’

이 놀이가 벌어지는 날이면 대곡사 주변은 부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자들은 진달래꽃을 따 머리나 옷에 꼽고 또는 꽃방망이를 만들어 들고 춤을 추는 등 온통 꽃밭 축제장이 됐다는 것이다. 의성은 고대 ‘조문국(召文國)’의 옛 터다. 신라가 팽창하면서 병합됐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신라 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조에 ‘파진찬 구도를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통일 신라인들은 조문국 고지인 탑리에 웅장한 오층 석탑(국보 제77호)을 만들어 놓았다. 이 탑은 9.6m가 넘는다. 필자도 30여년 전 탑리 폐사지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석탑의 장대함과 정연한 아름다움에 압도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탑은 혹시 신라에 병합돼 숨진 조문국 왕족들을 추모하기 세운 것은 아닌지. 흥미로운 것은 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조문국 왕이라는 ‘경문왕’의 역사를 상고해 왕릉까지 정비한 것이다.  

의로운 성 ‘의성(義城)’이란 명칭은 고려 초기 충신 홍술(洪術) 장군에서 비롯된다. 홍 장군이 후백제 견훤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자 태조 왕건은 ‘나의 좌우 팔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고 슬퍼하며 의성부(義城府)로 승격시켰다. 영예로운 이름의 역사도 1천여년이 넘는 셈이다. 

의성은 조선시대에도 충의 열사와 효자, 열부를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임진전쟁 때는 많은 선비 농민들이 의병의 대열에 참가go 의성을 지켰다. 이런 열정과 강인한 의성정신이 ‘팀킴’에 흐른 것이다. 한국의 명예를 세계에 드높인 컬링 낭자군 ‘팀킴’에게 거듭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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