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지승연 기자]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M씨어터에서 진행된 뮤지컬 ‘레드북’ 하이라이트 시연장면.ⓒ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M씨어터에서 진행된 뮤지컬 ‘레드북’ 하이라이트 시연장면.ⓒ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뮤지컬 ‘레드북’

 

‘여신님이 보고계셔’의 한정석·이선영 콤비 신작

현재 우리 사회 모습과 맞닿은 부분 보여 ‘쓴웃음’

[천지일보=이혜림·지승연 기자] 자칭·타칭 영국 신사들의 잔망스러운 발걸음, 원색적이지만 과하지 않은 대사, 언어유희를 활용한 넘버가 극장에 앉은 관객의 웃음을 뽑아낸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남녀 할 것 없이 한바탕 시원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뮤지컬 ‘레드북’이 관객을 만나고 있다.

뮤지컬 ‘레드북’의 주인공 ‘안나’와 ‘브라운’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여자가 개인 재산을 소유하려면 결혼을 해야만 하고, 남편이 잘못했어도 여자의 이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지식한 변호사 브라운은 신사 중 신사로 추앙받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남자들에게 주눅 들지도 않는 안나는 사람들로부터 별종 취급받는다. 안나는 슬퍼질 때마다 첫사랑과 보낸 시간을 그리며 야한 상상을 한다. 이 상상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인기도 얻은 안나는 곧 사회적 비난에 부딪혀 재판을 받게 된다.

뮤지컬 ‘레드북’ 공연사진.(제공: 바이브매니지먼트)ⓒ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뮤지컬 ‘레드북’ 공연사진.(제공: 바이브매니지먼트)ⓒ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뮤지컬 ‘레드북’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6 공연예술 창작 산실 우수 신작 선정 작품이다. 지난해 시범공연으로 관객을 만난 후 보수 과정을 거쳐 1년여 만에 본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작품은 이제 대학로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창작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만든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 콤비의 신작이다. 두 사람은 전작에서 한국전쟁 당시를 이념대립과 갈등, 어두움이 난무했던 그대로 표현하지 않았다. 여신님이라는 극적 판타지와 발랄한 노래를 사용해 희망을 그렸고,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번 뮤지컬에서도 두 사람의 작품 스타일이 도드라진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선택한 배경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시대라서”라고 밝힌 한정석 작가는 자료조사를 통해 당대의 모습 일부를 재현했으나 완벽하게 고증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관객은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거리감을 덜 느낀다. 오히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구나 싶어 쓴웃음을 짓게 된다.

뮤지컬 ‘레드북’ 공연사진.(제공: 바이브매니지먼트)ⓒ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뮤지컬 ‘레드북’ 공연사진.(제공: 바이브매니지먼트)ⓒ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작품에서 현대 사회와 가장 많이 맞닿아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여성의 성에 관련된 문제다. 남자의 성희롱 발언을 그대로 받아친 안나는 ‘미친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감옥에 갇힌다. 피해를 준 남자에게는 아무런 도덕적·사회적 비난도 돌아가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으로 갈등이 일어났든 간에 손가락질당하는 건 약자임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로부터 200년 이상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여권이 신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여성은 성(性) 문제에서 약자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뒀을 때 관객은 작품을 보는 내내 현재의 세태를 돌아보게 된다. 현재 문학계와 공연예술계에는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운동’이 활발하다. 수치스러운 과거를 밝힌 운동 동참자들은 하나같이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따가운 시선이 쏠리기 때문에 오랫동안 참고 숨겨왔다’고 말한다. 이제는 숨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의 모습과 안나의 행보가 겹쳐 보여 안나와 피해자 모두를 응원하게 된다.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M씨어터에서 진행된 뮤지컬 ‘레드북’ 하이라이트 시연장면.ⓒ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천지일보=지승연 기자]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M씨어터에서 진행된 뮤지컬 ‘레드북’ 하이라이트 시연장면.ⓒ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22

작품이 여성 캐릭터를 전면으로 내세우지만 그렇다고 여성이 겪는 인권유린이나 피해 상황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레드북’에는 어느 시대든 세상 모든 사람은 있는 그대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안나의 주제곡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로렐라이 언덕 문학회 회원들이 부르는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등의 넘버와 각 인물이 힘껏 외치는 대사는 일상 속에서 위축된 모든 사람을 격려하며 용기를 준다.

기자가 본 공연에선 배우 유리아, 이상이, 지현준이 각각 ‘안나’ ‘브라운’ ‘로렐라이’로 분했다. 배우 유리아와 지현준은 시범공연에 참여했던 원조 배우들이다. 관객의 웃음이 ‘빵’ 터지는 구간을 알고 있는 이들은 온 힘을 다한 맛깔난 연기를 선보인다. 새로 합류한 이상이도 유리아, 지현준과 함께 무리 없이 작품에 녹아들었다.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인권문제나 자아 찾기를 유쾌 발랄한 로맨스 코미디에 녹여낸 것과 작정하고 관객을 웃기는 배우들의 열연은 이 작품만의 특장점이다. 갑갑한 현실에 지친 관객에게 160분의 웃음과 위로를 주는 뮤지컬 ‘레드북‘은 오는 3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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