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평창동계올림픽이 남북관계에 가져다준 것은 기적과도 같은 잠시의 평화무드였다. 그것을 극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북 김정은 국무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특사로 방남(訪南)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며 평양을 방문해줄 것을 초청한 일이다. 평창올림픽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치러야 하는 절박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봄날과 같은 이런 기류를 조성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은 그들과 사전 협의가 없었던 일이 아니었을지라도 이를 고운 시선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비핵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 대화는, 대화를 위한 대화로서 무의미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같은 대화는 미국과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인 강한 비핵화 압박에 시달리는 저들에게 숨통을 터줄 뿐만 아니라 핵 무력 완성의 시간만을 벌어주게 된다는 것이 미국의 견해였다. 이래서 비핵화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은 채 남북화해와 대화분위기의 여세를 몰아 이어가려는 둣한 우리 정부의 움직임을 펜스 부통령을 비롯한 미 정부 요인들의 강경발언을 통해 견제하곤 했었다. 

북 비핵화문제는 한미동맹의 문제이자 국제적인 문제다. 설사 우리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독단으로 좌지우지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여정을 만나 김정은 위원장의 방북초청 및 관련 제안을 받고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여건’을 만들어가자” 하고 대답한 것은 슬기로웠다. 사태의 복잡성과 민감성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여건’을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정말 지난(至難)한 작업이다.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남북정상회담을 결행하기로 한다면 지금 서둘러 관련 당사국들 간의 조율을 이루어내야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일 수가 없다. 과연 북이 고분고분 할 것인가. 미국은 또 어떻고. 자칫 중간에 끼어 이쪽이나 저쪽 모두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딜레마(dilemma)는 바로 이 대목에 있으며 한미동맹과 국제적으로 대북압박전열에 불협화음이 생길 소지도 여기에 있다. 북에 유화적인 우리와 달리 미국의 요인들은 요즘 부쩍 ‘전쟁’에 관한 오싹한 화두를 새삼 입에 담기 시작했다. 예컨대 틸러슨 국무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난 중국 측 상대에게 당신과 내가 실패하면 전쟁으로 가게 된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공화당 소속 제임스 리시 상원의원은 한 국제회의에서 “북한에 대한 공격이 발생한다면 이는 문명 사상 가장 재앙적인 사건이 될 것이지만 매우 빠르게 끝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북에 대한 경고의 차원을 넘어 북에 유화적인 우리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하고 북의 페이스에 말리지 말 것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의 불가역적(不可逆的)인 비핵화는 가장 중요한 국내외의 시대적 역사적 현안이다, 그것에 이론이 없다. 비핵화가 본격 논의되지 않는 대화 자체를 위한 남북 대화는 썰렁하며 어디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주마가편일 것이지만 당국은 평창올림픽이 가져다준 잠시의 평화무드에서 깨어나 다시 냉정을 회복해야 한다. 비핵화에 남북대화와 화해무드의 초점을 맞추어 한미동맹 및 국내외의 우려를 씻어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남북 대화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과욕에 그칠 공산이 크다면 현명하기로는 우리의 전통적이며 확실한 생존기반인 한미동맹에 금이 가지 않게 하는 것이 옳다. 미국의 요로에서 우리를 향해 지금 한창 쏟아내는 직설적 또는 우회적인 불만과 경고는 바로 그 같은 선택을 요청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이 세계 최고의 동맹 모델의 파트너인 한국에 대해 세차게 가해오는 통상압력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은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에 2013년 반덤핑 상계관세를 부과한 것으로도 모자라 지난 1월에는 긴급수입제한조치인 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최고 50%의 턱없는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시장에 수출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 그런가 하면 미국 상무부는 최근 한국을 포함한 12개국의 철강 수출품에 대해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운 53%의 관세를 부과할 것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우리는 넋 놓고 있다가 기습을 당했다. 더구나 우리는 미국의 철강수입규제 대상에 낀 유일한 그들의 우방이며 동맹국이다. 우리가 중국 철강제품의 우회수출 통로라는 인식이 이런 사태를 불렀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있지만 이렇든 저렇든 미국의 움직임이 신경 쓰인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이런 통상압력에 ‘당당하고 결연하게 대응할 것’임을 방침으로 밝히고 있다. 그 기저에는 안보와 통상은 분리해 대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고가 깔려있지만 마찰이 심화돼 국민감정이 악화되면 사실상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태는 동맹인 양국 모두에 부담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문제는 국제통상 기구의 재단(裁斷)에도 오불관언하는 미국을 제어할 효과적인 수단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삼성과 LG 세탁기에 부과한 부당한 관세에 대해 우리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해 승소했지만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WTO가 관세를 내리라고 판결했어도 그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이 칼을 빼들면 당당하고 결연하게 대처해 승리한다고 해도 돌아오는 실익이 없다. 

이래서 필요한 것은 넋 놓고 있다가 당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벌여야 하는 선제적인 통상외교다. 일본 아베 수상은 트럼프가 취임하기도 전에 트럼프를 찾아가 만났다. 저(低)자세여서 보기는 안 좋았지만 통상 마찰을 잘도 모면하는 일본을 보면 그 덕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는 트럼프 취임 후에는 4500억 달러의 대미(對美)투자와 70만개의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을 약속하기도 했다. 꼭 이렇게 아베처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이 터진 뒤에 백 번 결연한 대처를 외치기보다 그 같은 선제적인 외교와 대응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안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선제적인 관리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파고가 거칠어지는 통상마찰의 의미도 곰곰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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