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완안부는 여진의 한 부족이었다. 고려가 건국될 무렵, 신라유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동북으로 이주해 여진과 융합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금의 시조 함보(函普)는 고려 또는 신라에서 왔으며, 당시의 나이는 60여세였다. 불교도인 형 아고내(阿古迺)는 한반도에 남으면서 후세의 자손들이 반드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함보는 동생 보활리(保活里)를 데리고 갔다. 함보는 복간수(僕幹水),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나중에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부(曷蘇館部)를 이끌고 완안부로 귀부하면서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지내굉(池內宏)은 조선사연구에서 당시 여진에는 외래인이 자신들을 교화시켰다는 구전설화가 많았으며, 여진의 풍습과 시조 이하 10명의 황제에 대한 기록을 감안하면 금의 시조는 가공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김상기(金庠基)는 금사만으로 시조를 가공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라고 반박했다. 김위현은 금사세기, 송막기문, 대금국지, 신록기, 고려사 세가 등을 근거로 이름의 표기는 다르지만, 금을 세운 아쿠타의 조상에 대한 세계가 대체로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금의 시조를 공상의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금사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은 여진족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하다. 기록에 나타난 당시의 여진족 사회는 부족국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개했다. 그러나 주변 문명과 교류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통해 고도의 문명국으로 성장했으며, 고려도 요와 송의 사이에서 세력균형의 한 축을 감당할 정도의 문명국이었다. 함보가 어떤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북방으로 이동해 타지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로 뛰어난 정치적, 문화적 소양을 갖추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홍호의 송막기문에 따르면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으로 완안씨라 불렀으며, 완안은 한어로 왕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김위현은 이를 지지하고 지도층이 된 후부터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완안이 왕이라는 뜻이라면 고려왕실의 성인 왕씨와 병칭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함보가 신라인이라는 설과 고려인이라는 설이 있다. 전자는 송막기문, 신록기, 이역지가 근거이다. 후자는 금사 본기와 아쿠타가 아지(阿只)에게 보낸 서찰에서 조부 시대부터 거란을 대국,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불렀다는 기록이 근거이다. 신라인지 고려인지가 불분명한 원인은 당시가 신라에서 고려로 교체되는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두 주장을 융합하면 고려에 귀부하는 것을 거부했던 신라의 왕족 또는 실력자일 가능성이 높다. 시조 함보에서 아쿠타까지는 약 200년이 지났다. 고려 건국이 918년, 신라 멸망이 936년이며, 금태종 완안성(完顔晟)의 즉위가 1123년임을 감안하면 대략 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금이라는 국명을 목덕인 거란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목극금(木克金)의 원리에 따랐다는 주장은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아쿠타는 변하지 않는 금의 성질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의 왕족 김성(金姓)이 십 수대동안 이어졌으므로 금이 신라에서 왔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으며 그것이 나라를 세우고 명칭을 정한 이유라고 했다. 완안의 후손이 청을 세운 아이신기오르(愛新覺羅)족이다. ‘신라’라는 글자가 보인다. 아이신은 여진어로 금(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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