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1970, 1986년 두 번의 멕시코월드컵이 끝난 뒤 국내 축구계에서는 ‘펠레 토막’ ‘마라도나 토막’ 같은 유망주를 찾는 소동이 한동안 벌어졌다. 사람을 물건을 가리키는 토막에 비유해 좀 그러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애달픈 국내 축구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브라질의 펠레(172cm),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166cm)가 작고 왜소하지만 뛰어난 기술력과 섬세함까지 갖춘 현란한 플레이로 세계 축구를 호령하며 소속 국가팀을 각각 정상에 올려놓으면서 축구 선수에 대한 안목이 확 달라졌다. 이상적인 축구선수의 키는 펠레와 마라도나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2010남아공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메시(167cm), 스페인의 다비드 비야(175cm) 등이 크지 않은 신체 조건 속에서도 폭발적인 공격력을 발휘하며 월드컵 그라운드를 질주하면서 다시 축구에서 키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 정도 키라면 한국 선수들도 세계적인 선수를 충분히 배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함께 커지고 있다.

지난 6월 한국을 다녀갔던 영국의 세계적인 축구 사회학자 리처드 줄리아노티의 유명한 저서 <축구의 사회학>에 따르면 “축구선수들의 신체 구조는 축구의 전통적인 신체에 대한 가정에 의해 선수를 일정한 포지션에 위치하게 만든다.

수비의 중심이 되는 골키퍼와 중앙 수비수는 보통 2m에 가까운 선수들의 몫이다. 일반 수비수들은 신장보다는 체력을, 미드필더들은 공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격렬한 플레이를 펼쳐야 하므로 보다 강한 육체를 필요로 한다.

최근의 예외적인 현상으로 태클과 패스를 시도하고 지능적으로 정확하게 공을 패스하는 ‘플레이 메이커’는 상대적으로 날렵한 신체를 필요로 한다. 중앙공격수인 센터포워드는 좀 더 특징적인 능력을 필요로 한다. 슈팅이 정확하고 힘이 있어야 하고 공중 볼을 차지하기 위해 키가 커야 하며, 수비수를 제치기 위해 뛰어난 순간 스피드를 갖추어야 한다.

윙플레이어는 작고 가벼울 수도 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타고난 ‘육체적’ 요인들이 경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밝히고 있다. 종종 특정한 포지션에 대한 신체적 기준은 나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문화적 요인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줄리아노티의 분석은 타당하다.

사상 첫 원정 16강이라는 쾌거를 이룬 한국팀의 경우를 접목시켜 보아도 그의 분석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75cm의 박지성은 미드필더에서 뛰어난 돌파력을 갖추고 한 방을 터뜨리는 공격력을 보여주었고 수비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저지하는 등 발빠른 공수 전환능력을 과시했다.

180cm의 키로 박지성과 함께 미드필드를 이끌었던 이청용은 약관의 나이에도 거리낌없는 플레이로 차세대 중앙미드필더로 자리잡았다. 182cm의 박주영은 중앙 공격수로 고공 헤딩능력과 득점능력을 갖추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이운재를 밀어내고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첫 주전 GK 자리를 꿰찬 정성룡은 키 190cm로 농구선수를 해도 될 법한 큰 신장을 갖추고 있는데 고공슛과 모서리로 파고드는 슛을 잘 처리해내는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그리스전과 나이지리아전에서 2골을 터뜨린 수비수 이정수는 185cm의 큰 키로 상대 공격수들을 체력적으로 제압하며 실점을 막는 데 주력했다. 한국 선수들이 경기 직전 그라운드에 죽 서 있을 때 키의 높낮이가 들쑥날쑥 했던 것은 이런 다양한 체격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키에 관해서는 줄리아노티의 분석에 맞게 비교적 고른 높낮이를 갖추었던 셈이다. 다른 나라 출전 선수들도 다양한 키로 각 포지션에 포진됐다. 장다리 포지션인 GK는 대체적으로 190cm을 넘었고 최전방 공격수들은 카카(186cm, 브라질) 드록바(189cm, 코트디브와르) 클로제(182cm, 독일) 호날두(186cm, 포르투갈) 등 대형 선수들이 즐비했다.

미들필드, 중원을 들락날락 거리며 헤집고 다닌 플레이 메이커 그룹은 메시를 비롯해 샤비 에르난데스(170cm, 스페인) 등이 안정된 볼키핑과 정교한 패싱력을 앞세워 경기 전체를 조율했다.

이번 남아공월드컵은 축구라는 종목이 신체적인 조건과 함께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고 정신적인 면까지 보태져 함께 노력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었다. 신장과 체력의 열세로 인해 국제경쟁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농구, 배구에 비해서 한국 축구는 포지션별 적재적소의 선수들을 잘 발굴해 키워 나간다면 앞으로 장밋빛 희망을 품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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