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박장 이수자 김기호 선생이 금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중요무형문화재 제119호 금박장 이수자 김기호

[천지일보=김지윤, 박선혜 기자] 전통왕실의복을 보노라면 왕과 왕비가 입었던 옷답게 일반 전통 한복보다 위엄이 풍겨져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일반 한복에서 볼 수 없는 금장식은 옷의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금박연’이라는 아담한 공방 겸 가게가 한옥마을로 유명한 종로구 북촌동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9호 금박장 김덕환 전수자에게 금박을 사사한 김기호, 박수영 선생이 공방을 지킨다. 김기호 선생은 김덕환 금박장의 장남으로 금박작업을 이어온 지 5대째다.

◆5대째 이어온 금박작업

김기호 선생은 본래 금박장에 뜻이 없었다. 유년시절부터 생활화된 금박작업이 그에게는 특별하진 않았던 터. 그러던 와중에 1997년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협심증으로 돌연 쓰러지자 아버지를 모실 겸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금박장의 길로 들어섰다.

늘 봐왔던 금박작업이지만 막상 배워보니 어려웠다.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곁에서 금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것도 잠시, 작업을 하면 할수록 금박의 매력에 빠져든 그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 박수영 선생도 자연스레 금박작업을 함께하게 돼 지금은 부부가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을 조사할 때 창피해 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작업장이 있어 금박작업을 따로 나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일하셨습니다. 그야 말로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이었죠. 집에서 일한다는 것과 당시 장인을 존경하거나 우대하는 사회분위기가 아니었으니 어린 마음에 부끄러워했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묵묵히 금박작업에만 몰두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부모님이 순수한 열정을 담아 금박 명품을 만들어낼 때마다 잠시 들었던 창피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다.

2008년에 김덕환 전수자의 작품을 전시한 <금박연(金箔宴)>이 열렸다. 이때 전시품으로 가족이 입었던 금박옷과 금박생활용품 등 지금껏 정성스레 만든 것을 그대로 선보였다. 특히 전시된 폐백보는 김기호, 박수영 선생이 결혼할 때 실제 사용했다.

김 선생의 말에 따르면 조선시대 25대 철종조에 고조부(高祖父)부터 가업이 내려왔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하는 금실로 짠 옷(금직옷)이 많았는데 교통이 여의치 못해 때때로 구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이에 김완형 선조는 금직옷이 무늬를 목판에 조각, 접착제를 이용해 판화처럼 찍었다. 그 위에 금을 입히는 기법을 사용했던 것.

“지난해에 명성황후 혼례 의궤에서 ‘조선왕실 금박장’이라고 적혀 있는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민간에서 금박장과 금박에 대한 존재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죠. 금박장에 대한 기록은 곧 우리 집안 내력입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금박과 관련된 것을 발견할 때마다 지금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생계유지보다 ‘사명감’ 우선

그는 금박장으로 걸어가면서 두 가지 고민을 품게 됐다. 하나는 우리 전통문양을 유지해야 하는 사명감과 또 다른 하나는 현대인의 삶에 맞게 실용적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다.

원형을 고집하자니 가게로 찾아오는 손님이 적어지고, 실용성만 강조하자니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잊힐까 걱정된단다. 두 가지 고민 가운데 그의 선택은 우리 전통문양을 이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문양을 약간씩 변화를 줘 금박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 것인데 조상이 해왔던 것을 버릴 순 없죠. 전 문양 원형을 지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게 문양을 부탁하는 손님들은 대부분 섬세한 문양을 주문한다고 한다. 옛 문양의 특징은 선이 굵고, 문양이 한정됐기 때문에 고객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을 터. 그는 생계유지가 될 정도에 한해서만 현대식 문양이 담긴 제품을 판매하고 대부분 전통문양을 고집한다.

“장인시장이 활성화돼야만 장인들이 지금보다 넉넉히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제작부터 영업, 광고 등이 체계적으로 잡혀야 하고 결국 하나의 기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 하는데 사실 이렇게 되면 장인들은 제작하는 데 집중하기가 아무래도 어렵죠. 명인은 이윤보다 혼이 담긴 작품을 제작하는 게 더 보람 있죠.”

◆자연스러움, 문양에 담다

오늘날 가(假)금박을 입힌 옷은 흔하지만 순금박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왕가의 여성들은 치마에 덧대는 스란에 금박을 붙여 중요 행사 때에만 붙였으며, 행사가 끝나면 도로 떼어내어 한지 속에 보관했다. 스란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과 용무늬가 금박으로 장식됐다.

금박장식은 불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왕실은 순금을, 불가는 가금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평민은 옷에 금을 붙이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주로 옷에 사용되는 금박은 금덩어리를 두드려 얇게 편 후, 접착제를 이용해 옷·그릇·가구 등에 섬세하게 붙이는 장식물을 말한다. 사찰 외에 왕실에서만 금박이 필요했기 때문에 금박장의 공방은 궁궐 안에 있었다. 궁중의 대소사가 있을 때 금박장이 입궐해 금박을 제작했다.

외국 디자이너와 달리 금박장은 문양을 만들 때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이는 자연스러움을 담는다는 우리 조상의 마음가짐이다.

“장인은 물건만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안목(眼目)이 있어야 장인이 되죠. 외국에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제작과정 중에 안목과 느낌으로 만들어 갑니다. 어떠한 것이 더 좋고 나쁘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창작물을 만들 때 접근방법(생각의 차이)이 다른 것이죠.”

◆장인문화, 홍보 절실

최근에 들어와서야 무형문화재를 포함한 장인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외국에 비해 우리 장인 지원정책이 미약하다. 실례로 유럽과 일본의 경우, 방송에서 장인을 주기적으로 소개·홍보해 국민이 장인과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두고 알아가고 있으나 우리는 상대적으로 장인문화를 쉽게 접할 수 없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럽 명품을 굉장히 선호해요. 이는 국가에서 장인에 대한 이야기 등 홍보를 철저히 한 결과입니다. 우리 명품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죠. 그러려면 장인과 물건을 많이 봐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장인과 이들이 만드는 물건에 대해 자연스레 학습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합니다.”

1997년 1월에 금박작업을 배우기 시작한 김 선생은 지난해 12월에 이수했다. 금박장 전수자(기능보유자)가 되기까지 과정은 전수장학생, 이수자, 전수조교를 거쳐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수십 년이 걸리지만 그와 아내는 묵묵히 인내를 발휘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도 4년 전에 비로소 전수자로 등록됐다”며 “금박작업 경험이 풍부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있다”고 말을 마쳤다.

후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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