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평창에 나타난 북한 김영남 김여정 경호원들은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북한의 헌법상 국가수반과 최초의 ‘백두혈통’의 대한민국 방문에 김정은은 자신의 전용기와 전용 경호원들을 파견하면서 최상의 예우를 갖추었다. 평양의 지도부는 평창올림픽을 기회로 탈출구를 마련하고 나아가 평화프로세스에 편승하고자 중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평창 이후의 문제다. 과연 북한과 한국, 그리고 미국과 주변국 중 누가 먼저 평화의 열차에서 뛰어내리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이 최우선 정책 순위가 된 이상 미국이 이를 대충 덮고 지나갈 가능성은 작다. 

미국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군사조치까지 동원해서라도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신호를 평양에 끊임없이 보냈다. 대북 압박에 유화적인 발언 하나로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빅터 차를 낙마시켰다. 군사옵션을 단지 협상카드로만 쓰려 했다면 ‘코피 터뜨리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를 낙마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 미국이 실제로 군사조치를 시도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다만 현 단계에선 강력한 대북제재를 통해 북한을 비핵화 협상으로 끌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의회에서는 “그런 군사옵션은 어렵다”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우리 정부는 평창올림픽으로 마련된 남북대화 분위기가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북·미 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남북대화-북한 도발 중지’는 가장 약한 고리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지하는 대가로 ‘제재 완화와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원칙을 철저히 지키려는 미국 대신 남한이 주도적으로 나서기를 원할 것이다. 남한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자체를 완화할 힘은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 명분을 만들어 제재에 구멍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한·미 군사훈련도 시늉만 내도록 요구할 수 있다. 

혹여 북한이 이러한 요구를 한다면 우리 정부는 분명히 거절해야 한다. 제재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때, 한·미 동맹이 이완될 때 가장 큰 피해를 볼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제재는 전쟁을 막고 평화적으로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고난도 행군’이다. 이 행군에서 한국이 이탈하는 조짐만 보여도 제재 효력은 반감된다. 그 경우 북·미 간 협상은 시작조차 할 수 없거나 시작되더라도 결렬될 가능성이 크다. 핵동결·비핵화를 위해서는 협상을 하지 않을 경우 잔혹한 경제적 대가가 김정은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의 선의(善意)에 기대다간 오히려 전쟁으로 갈 가능성만 키울 수 있다. 이것이 대화를 하더라도 제재 강도를 낮추지 말아야 할 절실한 이유다. 

우리 정부는 북한 정권의 행태를 철저히 학습해야 한다. 2014년 10월 아시아게임 폐막식 때 북한 실세 3인방인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갑자기 한국을 방문한 것도 경제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북한 수출의 40%를 차지하던 무연탄 가격이 2011년에 비해 2014년엔 절반으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경제성장률도 2012~2013년 평균 3% 정도에서 0%로 추락했다. 경제와 외화벌이에 비상등이 켜지자 일본·러시아의 관심을 타진하다가 실패하니 한국에 온 것이다. 이번 평창올림픽 참가도 마찬가지다. 북한 참가의 일등 공신은 김정은의 선의가 아니라 목을 조여 오는 강력한 대북 경제제재다. 한국이 대화만을 통해 참가를 설득했다면 북한은 막대한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양보를 요구했을 것이다. 김정은은 김여정까지 투입해 제재의 판을 크게 흔들어 보려 한다.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남한과의 대화는 물론 문재인 대통령을 북한에 초청하기까지 했다. 북한 상황이 절박해졌다는 신호다. 그러나 북한이 요구할 경제제재 완화는 ‘트로이 목마’다. 

이를 수용한다면 한국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북한 선수와 응원단에 대해선 마음을 더 열자. 포용하고 힘껏 격려하자.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고 자유와 번영의 길이 있다는 영감을 선물로 주자. 그러나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서는 냉정해야 한다. 핵 문제가 해결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한 평창 이후도 이전과 달라질 것이 없다. 가면 뒤 김정은의 민낯을 바로 봐야 한다. 김정은의 선글라스는 그의 경호원들이 낀 것보다 훨씬 검은색이 짙다. 김정은은 동생 하나 보내놓고 마치 평창행 출발 평화열차에 몸을 실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열차는 아직 출발도 안 했고 문재인 대통령의 초대장은 인쇄도 안 됐으며, 김여정이 딴 남북대화 ‘금메달’은 아직 서울에 보관돼 있다. 먼저 북한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서울에서 부른 삼지연관현악단의 노래가 그대로 평양에서 공연되듯, 김영남과 김여정이 보고 간 대한민국의 모습을 북한 땅에 구현하도록 노력하시라. 김정은이여! 선글라스를 벗고 세계를 바라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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