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박완희 기자] 이산가족 1세대 전영철(88, 남)씨가 7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7
[천지일보=박완희 기자] 이산가족 1세대 전영철(88, 남)씨가 7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7

‘이산가족 1세대’ 전영철씨

월남 68년째, 또렷한 고향 기억

“민간 교류가 남북통일의 지름길”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명절만 되면 다섯 식구가 함께 선산(先山)에 올라 앉아 음식을 나눠먹었던 기억이 더 선명해져…. 죽기 전에 고향 땅 한번 밟아보고 죽는 게 내 한평생 소원이야.”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 1세대 전영철(88, 남)씨는 7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진행한 본지와의 인터뷰 중 명절 계획을 묻는 질문에 눈시울을 붉히며 이같이 말했다.

반드시 통일이 올 거라고 믿었던 세월이 어느덧 68년째, 전씨는 “월남 뒤로 나에겐 명절은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산가족 1세대’다. 이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전에 북한에서 월남한 자이거나 남한에서 월북한 자 또는 그의 가족을 말한다.

전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홍원군 경운면 자산리 190번지. 그는 “68년이 지났지만 고향 주소는 절대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씨는 삼형제 중 둘째였다. 말과 닭 등 가축을 기르던 아버지와 어머니, 북한 육군사관학교 1기생이였던 큰형, 국민학교 4학년이던 막내동생과 함께 살았다. 당시 19살이던 그는 함경남도 북촌에 위치한 한 농업전문학교에 다녔다.

1950년 4월 19일, 학교에 찾아온 북한 경찰 간부는 그에게 ‘인민군’ 지원을 요구했다. 6.25 전쟁의 ‘준비’였다. 그는 “그날 사촌형을 만났는데 ‘빨리 도망가라, 곧 전쟁이 날 것 같다’고 해 그 뒤로 겁이나 곧장 도망쳤다. 잡힐까 두려워 전쟁 직후까지 숨어다녔다”고 설명했다.

[천지일보=박완희 기자] 이산가족 1세대 전영철(88, 남)씨가 7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7
[천지일보=박완희 기자] 이산가족 1세대 전영철(88, 남)씨가 7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7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후에도 그는 줄곧 숨어다녔다. 그 사이 1951년 1월, 북한군은 18만명의 중공군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서울을 점령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를 찾는 북한군의 수색반경이 더 넓어지면서 불안감을 느낀 그는 당시 후퇴하고 있는 미국군에 몰래 합류해 북한을 빠져나왔다.

그는 “어머니를 꼭 안아드리며 ‘3개월 후에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며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 약속이었다”고 회상했다.

6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가족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고향 생각에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그는 “가족이 너무 그리울 때마다 어머니, 고향무정, 홍시 등의 노래를 불렀던 게 이제는 매일 부르는 습관이 됐다”며 “가족사진조차 없어 점점 가족들의 얼굴이 잊혀져가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현재 그는 40년째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1975년도에 ‘함경남도 중앙 도민회’ 해외지부를 만드는 등 이산가족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해외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왔다. 그는 “시드니에서 이북사람을 만날 때면 항상 식사와 차를 대접했다”며 “이북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에 묻어뒀던 가족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민간 교류가 남북통일의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남북 간 시민의 교류가 있다면 그게 바로 통일의 지름길”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실향민 문제해결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 만큼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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