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곳간, “범인은 바로 너” 진범 찾는 조선판 CSI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11
문화곳간, “범인은 바로 너” 진범 찾는 조선판 CSI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2.11

中 원나라 법의학서 ‘무원록’
세종·정조 때 조선에 맞게 고쳐

수차례 검시 반복, 원인 파악
은비녀로 독살 확인하기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은 해다. 화재사고는 물론 더욱 전문적인 수사가 필요한 사건사고도 많다. 오늘날에는 과학수사가 있어 살인·범죄 등 각종 사고 원인·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없던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사건을 해결한 걸까.

◆수사기법 담긴 교과서 등장

조선시대라도 막무가내로 범인을 체포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에도 상당히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를 둔 수사 기법을 담은 법의학서가 나왔다. 대표적으로 ‘무원록(無寃綠)’이 있다. 이는 원래 중국 원나라 때 왕여(王與)라는 사람이 지은 것인데 ‘원이 없도록 한다’, 즉 죽은 자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도록 한다는 뜻이다.

15세기 초 세종은 이 책의 내용을 나라의 상황에 맞게 다듬고, 주석을 달아 새롭게 ‘신주무원록’으로 고쳐냈다. 조선 정조 임금 때에는 ‘증수무원록’이라는 책이 발행됐다. 이는 사건을 수사하던 사람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책이었다.

증수무원록에는 이 같은 구절이 있다. ‘살인한 칼이 오래돼 핏자국이 남아 있지 않거든, 강한 식초를 뿌려라. 핏자국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우리 피 속에 ‘알부민’이라는 단백질이 들어있는데, 칼에 피와 함께 알부민이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알부민이 식초와 같은 산성 물질을 만나면 뿌연 색을 띠며 굳어 버린다. 선조들이 이 같은 산과 단백질의 원리를 알고 과학 수사에 활용한 것이다.

보통 시체 검시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 할 수 있도록 했다. 오작인이 시체를 살펴보 다루는 일을 수행했고, 고을의 수령은 검시 작업을 지휘하고 시체를 검사해 사인을 밝혀내는 일을 맡았다. 이에 고을 수령에게 무원록은 필수 서적이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부검하지는 않았다. 유교적 윤리 의식 때문에 시신에 칼을 대 해부하는 것이 금기시됐다. 이에 몇 번이고 다른 사람이 검시를 반복했다. 이 경우 시신 상태나 주변 정황을 더욱 꼼꼼히 살폈다.

특히 얼굴색을 유심히 봤는데 진한 붉음, 시퍼렇게 붉음, 검붉음 등 여러 경우로 나뉘어 기록했다. 검붉음은 보통 목이 졸려 사망했을 경우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정맥이 막혀 피가 머리 쪽으로 몰리게 돼 얼굴이 검붉게 되는 것이다.

◆독살일까, 아닐까

하지만 육안만으로는 조사를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때로는 여러 약품과 도구를 함께 사용했다. 독살 여부를 확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은수저법’을 사용했다. 시체 목구멍에 은수저나 은비녀를 넣어서 검은색으로 변하는지 여부를 통해 독살을 판단했다. 이는 은이 독(비소와 황)에 닿을 경우 까맣게 변하는 성질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또 찹쌀밥을 시체 목구멍에 넣었다가 뺀 후 밥을 닭에게 대신 먹이기도 했다. 이때 닭이 죽을 경우 독살로 판단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검시는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4년 5월 경상도 문경군 신북면 화지리에 살던 양반 안재찬은 아내 황씨가 스스로 목매 자살했다고 관아에 신고했다.

이때 경상도 문경군수는 사체의 여러 가지 상흔과 주변 정황 등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자살이아니라 타살임을 밝혀냈다.

사연을 들여다보니, 안재찬이 그의 아내 황씨가 그간 불륜을 저지른 것을 알고 구타하고 살해한 후 마치 자살한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것이었다. 비록 오늘날에 비해 전문 기술은 떨어졌겠지만, 진실을 밝히고자하는 선조들의 지혜는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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