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그리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감옥’을 보았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도로로 내려가서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 오른편에 있다. ‘소크라테스 감옥’은 바위 언덕을 파놓은 굴 같다. 감옥은 3칸인데 창살이 있고 자물쇠로 잠겨 있다. 

아, 이곳에서 소크라테스(BC 469∼399)가 독배를 마셨구나. 도망가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명예롭게 죽음을 택했구나.   

BC 399년 봄에 시인 멜레토스와 정치인 아니토스 그리고 변론가 리콘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고발장은 이렇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선서 진술을 함. 소크라테스는 첫째,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법을 어겼고, 둘째,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점에서 법을 어김. 구형은 사형.”   

당시에 아테네는 혼란의 시기였다. BC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430년에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아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했고 정치가 펠리클레스도 전염병으로 죽었다. 전쟁은 BC 404년까지 27년간 계속됐는데 아테네가 패전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30인 참주 정권을 수립했다. 30인 참주는 공포정치를 하며 민주파 시민 1500명을 죽였다. 게다가 아테네 시민 수를 3천명으로 제한해 정치 참여를 막았다. 이러자 시민들이 저항했고 BC 403년에 민주파가 참주를 몰아내고 민주정치를 회복했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 있는 시민법정에 출두했다. 먼저 고발인들이 두 번의 연설을 통해 고발이유를 밝혔고, 다음에 소크라테스가 변론했다. 

변론 중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이 아폴론 신을 믿는 델포이 신전을 찾아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가 누군지를 물었다. 델포이의 무녀는 소크라테스라고 답했다. 소크라테스는 귀를 의심했다. 그는 신탁을 반박하기로 결심하고, 아테네에서 현자라고 일컬어지는 정치인·시인·기술자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 했다. 이들을 만난 후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 내가 현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특유의 산파술로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원한을 산 것이다. 

재판결과는 501명의 배심원 중 유죄 281명, 무죄 220명으로 유죄가 선고됐다. 다음은 형량을 정하는 재판이었다. 고발인은 사형을 주장하고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에게 선처를 호소하기는커녕 처음에는 표창을 받아야 한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벌금형을 제안했다. 이 바람에 동정표마저 사라져 배심원들은 360명이 사형에 표를 던졌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한 달간 미루어졌다. 이 시기는 아폴론 신의 탄생지 델로스 섬에서 종교제전이 있어 사형집행이 금지됐다. 

크리톤 등은 소크라테스에게 도주를 권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했다. “철학하는 자유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내 이성의 명령이네.” 

BC 399년 5월에 소크라테스는 한 달 동안 제자들과 담소하다가 독차를 마시고 죽었다. 나이 70세였다. 가장 양심적인 철학자가 아테네의 민주법정에 의해 사형 당한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법의 공정성과 배심원제의 맹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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