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덕의사(행주기씨사당내) (제공: 조성린 문학박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29
덕의사(행주기씨사당내) (제공: 조성린 문학박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29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의 청백리 중 한 사람인 기건 선생의 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청파(靑坡)․현암(眩菴)이다. 시호(諡號)는 정무(貞武)다. 할아버지는 직장(直長) 기중평(奇仲平)이고 아버지는 공조전서 기면(奇勉)이다.

기건 선생의 집은 청파의 만리현에 있었다. 항상 걸어서 성균관에 다니면서 ‘중용․대학’을 외웠다. 배움과 행함으로 이름이 높아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세종18년(1436) 경력(經歷)에 임명됐고 그 뒤 연안군수가 됐다.

기건 선생은 전임군수가 붕어를 좋아해 군민들이 붕어를 잡아 진상하느라 고생한 것을 알고 재임 동안 한 번도 붕어를 먹지 않았다. 술 또한 마시지 않았다. 벼슬이 바뀌어 돌아올 때 부로(父老)들이 떠나보내기 위해 예를 갖추는데, 기건 선생이 종일토록 술을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부로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야 우리 백성을 위해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고 했다.

세종24년(1442) 사헌부 집의(執義:종3품)로 있다가 이듬해 제주목사에 임명됐다. 평생토록 복어를 먹지 않아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제주 현지에 가서 주민들이 해산물 채취와 고기 잡는 고달픔을 보았기 때문에 차마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역대 인물들의 전기·일화들을 뽑아 엮은 책인 ‘대동기문’에는 기건 선생의 일화가 담겨있다. 내용에 따르면, 제주는 예전부터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골짜기에 버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곳에 기건 선생이 장례 치르는 법을 가르쳤다.

하루는 꿈에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뜰아래 와서 절하며 “공(公)의 은혜 덕에 뼈다귀가 나뒹굴지 않게 되었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공께서는 올해 어진 손자를 보시게 될 겁니다”라고 했다. 과연 그 해에 손자가 태어나서 뒤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지내고 자손도 크게 번창했다.

기건 선생은 세조3년(1457)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벼슬이 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그는 ‘너울’을 창안해 부녀자들이 외출 시 머리 덮개로 이용하게 했다. 즉 그는 우리나라 풍속에서 너울을 사용하도록 한 인물인 셈이다.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마음이 곧고 굳으며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했으며 뒤에 청백리에 선정됐다.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됐다.

도움말: 문학박사 조성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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