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2017세계인권도시포럼’ 이 14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김대중컨벤션센터 4층에서 열린 가운데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지원회’)의 다카하시 마코토(高橋 信) 공동대표 부부가 광주시 명예시민증을 받고 윤장현 광주시장의 개회사를 경청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28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2017세계인권도시포럼’ 이 14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김대중컨벤션센터 4층에서 열린 가운데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지원회’)의 다카하시 마코토(高橋 信) 공동대표 부부가 광주시 명예시민증을 받고 윤장현 광주시장의 개회사를 경청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28

 1986년 근로정신대 문제 처음 공론화한 日 양심세력
“내 딸이 그 일 겪었다면… 소녀들, 삶 전부 잃은 것”
‘도쿄 금요행동’ 시나가와역·미쓰비시重 앞 매주 시위
“광주는 제2의 고향… 사후 무등산에 유골 뿌려주길”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윤동주의 서시를 읊조리며 근로정신대 투쟁을 이끄는 백발의 일본인. 일제침략 행위를 고발하는 얘기는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30여년 전 일본에서 조선인징용 피해자 문제에 눈떠 일본 전범기업과 우익세력에 맞서 줄기차게 투쟁해온 사람이 있다.

주인공은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대표로서 지난해 9월 14일 광주명예시민상을 수상한 다카하시 마코토씨다. 천지일보는 명예시민상 수상 취재를 인연으로 지난 22일 이메일을 통해 다카하시 대표와 신년인터뷰를 진행했다.

-한일 양국을 통틀어 가장 먼저 근로정신대 문제를 제기했는데 계기가 있다면.

1986년 봄,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의 피해 사실을 알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은 항공기 생산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12~14세의 어린 소녀들에게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도 가고 2년 만에 졸업할 수 있다” “급료도 받고 맛있는 밥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거짓말로 속여 그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졌던가? 불법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며 침략전쟁과 천황숭배를 위한 무법적 권력을 휘두르며 힘든 작업을 강요했다. 오로지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일을 알았을 때 제 딸의 나이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끌려갈 당시의 나이와 같은 14살이었다. 만일 내 딸이 이 같은 피해를 입었다면 아버지로서 어떨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소녀들은 일본 패전 2달 후인 1945년 가을 맨몸뚱이로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 ‘정신대=일본군 위안부’라며 손가락질을 했으니 그 고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소녀들은 일본에 다녀온 과거와 피해 사실을 숨기며 살아야 했고, 청춘뿐만 아니라 인생 그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이것이 바로 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에 투신하게 된 계기다.

광주명예시민상을 수여한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 대표(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가 미쓰비시중공업에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매주 금요일 오전 도쿄 시나가와 역과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시위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 (제공: 다카하시 마코토)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28
광주명예시민상을 수여한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 대표(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가 미쓰비시중공업에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매주 금요일 오전 도쿄 시나가와 역과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시위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 (제공: 다카하시 마코토)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28

- ‘금요행동’을 통해 일본 전범기업에 항의할 때 우익단체로부터 방해를 받은 적은 없는가.

2007년 5월 31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하고 곧바로 ‘도쿄 금요행동’을 시작했다. 미쓰비시중공업에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매주 금요일 오전 도쿄 시나가와역과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매주 왕복하며 전개해온 원정 집회는 금요일 열리는 미쓰비시 주요 사장단 회의를 겨냥한 것인데 지난해 12월 1일 400회를 맞았다. 교통비 등 자비 갹출을 마다 않고 먼 곳까지 오가며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힘써준 회원들에게 감사하다. 시나가와역 앞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는 우리의 손길을 대부분 외면하지만 그래도 관심을 보이거나 전단지를 받는 이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다행히 우익단체로부터 조직적으로 방해를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라고 폭언 또는 무언의 항의 전화를 수차례 받은 정도다. 금요행동 현장에선 “당신들 조선인이야?” “조선인들에게 돈을 받은 거냐?” “이미 다 끝난 문제 아니냐? 이 거짓말쟁이들” 등의 야유를 들은 적도 있다.

-광주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연대활동을 소개해달라.

광주와 나고야가 공동으로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에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고 매년 6월 미쓰비시중공업 주주총회에 맞춘 선전활동, 그리고 금요행동 또한 연대의식으로 실천해왔다.

또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협상을 위한 5인 협의단(일본인 3명, 한국인 2명)을 결성해 2010년 1월~2012년 7월 총 16차례 교섭을 진행했다. 광주지방법원·고등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을 방청했고 나고야에서 한일변호단과 지원자들의 교류 모임 4회, 나고야재판기록 한국어번역 출판기념집회 등을 진행했다. 지난해 5월 19일에는 일본인 최초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2010년부터 양 시민단체가 한일청소년평화교류 프로그램을 마련, 10~20명의 광주 고교생들이 매년 나고야를 방문하고 있다.

-사후 광주에 분골 의사를 밝혔는데 어떤 심경에서인가.

내게 근로정신대 문제는 평생의 과제다. 그렇게 몰두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교류했고 광주 근로정신대 시민모임과 연대할 수 있었다. 광주는 내게 제2의 고향이 됐다. 올해는 근로정신대 소송에서 승리해 무등산에 올라가 세계를 향해 ‘이겼다’고 외치고 싶다. 사후엔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처자, 손녀딸 ‘하나’가 유골을 무등산에 뿌려주길 바라고 있다.

-윤동주 시인을 흠모해 관련 서적을 읽고 있다고.

2017년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었다. 일본의 양심적 매스미디어의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윤동주 시인의 위대함을 다시 인식했다.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윤동주 시인의 업적을 경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5월과 9월 두 차례 변호단, 나고야 지원회원들과 함께 윤동주문학관을 방문했다.

-신년 계획에 대해.

2018년 전반기에 대법원 판결이 나올 거라고 확신한다. 그 판결에 근거해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협의를 재개, 근로정신대 피해소송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이것이 유일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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