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무
 

허영자(1938~  )
 

어느 날 홀연히
그 나무가 사라졌다

주소록에서 이름 하나를
또 지워야겠다

검은 새 한 마리 기울뚱
서편 하늘로 날아간다.
 

[시평]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인가, 오래 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시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죽었다는 부음이 들려온다. 신현정 시인이 몇 해 전에 유명을 달리했고, 이내 김종철 시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근년에 들어 정진규 시인, 조정권 시인, 며칠 전에는 이승훈 시인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부음이 전해져 왔다. 어느 날 홀연히,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던 그 나무가 홀연히 사라지듯이 이 지상에서 그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한 사람이 떠나가면, 이 지상에서 서로 소통을 하던, 그 수단이 됐던 주소록이나 전화번호 또한 우리는 지워야 한다. 이제는 이 지상에서 소통이 되던 이들 주소록이나 전화번호라는 기재는 더 이상 그들과 소통의 기구가 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서는 소통이 더 이상 될 수가 없게 된다는, 참으로 슬프고 슬픈 일들, 우리는 그렇게 겪으며 또 하루를 맞이한다. 우리 일상의 방법으로는 결코 서로 소통이 되지 못하는 다른 세상으로 그들을 떠내 보내는 의식을 치루고 돌아온 저녁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지상에 남겨놓은 많은 시편(詩篇)들, 그 시들이 바로 이들과의 소통을 하는 그 길이 아니겠는가. 주소록에서 이제는 떠난 그 사람의 주소, 전화번호, 그렇게 지워버리고는, 망연히 서편 하늘로 기우뚱 날아가는 검은 새 한 마리 바라보다가, 문득 그들이 남겨놓은 시 한편 펼쳐본다. 그들과의 소통의 시간, 그렇게 잠시나마 이 지상에서 가져본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