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박종철 거리 선포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허경진 관악민주주의의길을걷다 사업추진단장이 사업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17
지난 13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박종철 거리 선포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허경진 관악민주주의의길을걷다 사업추진단장이 사업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17

고시생 빠져나가 지역 침체

민주화 현장 관광코스 개발

故 박종철 열사 거리 조성

작가클럽·고시촌영화제 추진

“문화·참여의 장 만들어지길”

 [천지일보=박정렬 기자] 서울 관악구 대학동. 사법고시 준비생들이 많아 고시촌이라 불렸지만 로스쿨 도입에 따른 고시생 급감으로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고시생들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와 상권을 형성한 이곳이 이제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런 고시촌을 문화가 숨쉬는 거리, 민주주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뛰고 있는 지역 활동가 허경진 ‘사람과이야기’ 대표를 만났다.

허 대표를 만난 지난 13일 오후, 고시촌의 한 고깃집 앞에서는 이 동네에서는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31년 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에 의해 사망한 서울대학교 박종철 열사를 기념하는 ‘박종철 거리 선포식’이다. 행사장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는 당시 박종철 열사가 지내던 하숙집이 있다. 박종철 열사가 경찰에 연행된 하숙집에서 가까운 곳에 열사의 모습을 벽화로 그리고 추모 동판을 설치해 ‘박종철 거리’라 이름 지은 것이다.

박종철 거리 조성은 ‘관악 민주주의의 길을 걷다’ 사업추진단이 주체가 돼 추진했다. 관악구의 다양한 분야 활동가들이 의기투합해 결성한 이 사업추진단의 단장이 허경진 대표다.

지난해 4월 결성된 추진단은 벽화길 조성, 성인을 대상으로 한 테마별 민주주의 체험, 학생들을 위한 민주주의 체험 및 서울대 대학문화 견학 등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콘텐츠의 근간은 1970~80년대 민주화를 외치다 산화한 서울대 학생들의 이야기다. 추진단은 서울대학교 민주동문회와 함께 18명의 민주열사에 대한 사례를 찾아냈다. 여기에 난곡 등에서 펼쳐졌던 빈민운동, 녹두거리, 변혁의 시대를 함께 한 서점 등 다양한 스토리가 더해졌다. 이런 스토리를 엮어 관광코스를 만드는 것이 추진단의 큰 계획이다.

허 대표는 “박종철 거리에 이어 올해 신림사거리에 서울대학교 김세진·이재호 열사 추모공간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세진·이재호 열사는 1986년 4월 28일 신림사거리 서광빌딩에서 전방입소교육 거부 등을 외치며 분신, 다음 달인 5월 3일과 26일 각각 사망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결국 1989년 1학기부터 전방입소교육은 폐지되기에 이른다.

박종철 거리 조성 과정.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종회 화백이 박종철 열사를그리는 모습,  1987년 6월항쟁을 형상화한 그림, 박종철거리 안내판, 박종철 열사의 누나 박은숙씨가 열사의 얼굴을 새긴 동판을 보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17
박종철 거리 조성 과정.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종회 화백이 박종철 열사를그리는 모습, 1987년 6월항쟁을 형상화한 그림, 박종철거리 안내판, 박종철 열사의 누나 박은숙씨가 열사의 얼굴을 새긴 동판을 보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17

 

허 대표는 신림역 근처에 있는 봉림교에 대한 독특한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민주진영의 대통령이었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선거운동 당시 마지막 날 마지막 유세를 펼쳤던 곳이 바로 이곳 봉림교”라며 상징성을 부여했다. 이곳도 민주주의의 길 일부로 꾸며질 예정이다.

허 대표가 그리는 민주주의의 길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되 현실을 고민하며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청소년 아크로폴리스’다. 촛불과 함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청소년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허 대표는 “관악산 입구에 있는 만남의광장주차장, (협의가 필요하지만) 서울대학교 캠퍼스 안에서도 이런 토론의 장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전국에서 온 청소년들이 한데 모여 토론하고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이벤트를 통해 관악구가 민주주의와 참여를 상징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고 희망을 밝혔다.

이런 토론의 장은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허 대표는 “고시촌의 많은 점포들 중에 소규모 강연이나 토론이 가능한 공간이 여럿 생겨나 ‘고시촌에 오면 항상 무언가 토론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라는, 생활 속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곳이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또 한편으로 허 대표는 고시촌을 문화촌으로 탈바꿈시킬 그림을 그리고 있다. 허 대표가 고시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약 5년 전이다. 고시생들이 점점 빠져나가면서 관악구에서도 관련 용역을 진행해 활성화 방안을 찾으려 고민하고 있었다.

허 대표는 “고시생의 빈 자리를 스토리텔링 작가들로 채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스토리텔링작가클럽하우스”라며 “구청의 지원으로 작가들에게 거주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작가들이 이곳에서 작품활동, 상호 교류는 물론이고 주민들을 위한 강연도 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현재 10명의 작가들이 작가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다.

2016년 11월 관악구청소년회관에서 열린 제2회 고시촌영화제 모습. (출처: 관악구 홈페이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17
2016년 11월 관악구청소년회관에서 열린 제2회 고시촌영화제 모습. (출처: 관악구 홈페이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17

허 대표의 또 하나의 직함은 ‘고시촌영화제’ 집행위원장이다. 허 대표의 원래 직업은 영화감독이다. 한 때 상업영화를 만들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인연을 맺으면서는 민주인사들을 담은 다큐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고시촌영화제는 이른바 B급을 표방한다. 스마트폰으로 제작한 영화도 출품 가능하며 소재나 내용에 있어서도 제약이 많지 않다. 허 대표는 “구청의 예산이 투입되는 행사인 만큼 구청 입장에서는 한편으로 ‘B급’ 작품들의 수위가 과하진 않은지 걱정됐을 법도 한데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며 “집행위원회에 영화제 진행을 일임하고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 이런 측면에서는 유종필 구청장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극단 고시촌’과 ‘민주주의의 길 마을관광 해설사’ 등이 지역의 문화활성화, 체험관광을 준비하고 있다.

허 대표는 “이런 사업은 전적으로 지자체 예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자체장의 마인드에 따라서 곧 없어질 수도 있는 사업”이라며 “이번 지방선거에서 선출될 구청장이나 시장이 문화에 깨어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비쳤다. 이어 “내년 중반까지 관악 민주주의의 길 10군데 현장이 관광코스로 완성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내년이나 내후년 이곳 대학동은 얼마만큼의 문화를 담아내고, 얼마나 다양한 생활 속 민주주의를 실현해 내고 있을까. 건물을 짓고 도로를 내서 만들어지는 지역활성화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문화촌, 민주주의의 길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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