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왜(倭)는 대륙으로 나아가는 데 길을 내라며 조선을 침략하니 7년 전쟁 임진왜란이다. 이순신 장군은 ‘생즉사 사즉생’의 정신으로 싸웠고, 한편으론 명나라의 도움으로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다.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혼란을 틈타 북방 여진족은 힘을 키웠고, 드디어 후금을 세워 명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위험에 처한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당시 임진왜란을 경험한 광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북파와 함께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중립 외교)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며 실리를 쫓았다. 오늘날 사학자들이 광해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광해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던 서인세력이 반정을 꾀해 광해를 내쫓으니 인조반정이며, 조선은 인조정권과 함께 친명세력인 새로운 집권세력(서인)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광해와 원만한 관계를 갖던 후금은 광해를 내쫓았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니 임진왜란이 끝난 지 35년 만에 찾아온 정묘호란이다. 이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고, 후금은 명나라와도 전란 중에 있었으므로 지체할 수 없어 조선과 ‘형제맹약’을 맺고 돌아갔다.

또다시 9년이 지나 후금을 세운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이라 하고 자신의 호칭을 ‘칸’에서 ‘황제’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조선이 응하지 않자 청은 최후통첩을 하게 되고, 조선 조정은 명과의 의리와 명분을 앞세우며 청과 싸우자는 척화파(김상헌)와 힘을 기를 때까지 훗날을 기약하며 일단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재난만큼은 막아보자는 주화파(최명길)의 치열한 내분 끝에 척화파에 의해 집권한 인조는 척화파의 손을 들었고, 이에 청은 기병을 앞세워 5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강화도 퇴로마저 차단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니 병자년에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병자호란이다. 이때 임진왜란 때보다도 더 비참하고 비굴한 역사의 흔적을 남긴 사건이 ‘삼전도 굴욕’이다. 일명 인조가 청 황제에게 행한 항복의식 곧 ‘삼배구고두례’다. 이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백성 60만명과 함께 포로가 돼 심양으로 끌려갔으니 이보다 더 슬픈 역사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고려의 내분으로 몽고의 침략을 받아야 했고, 조선 또한 동·서의 분쟁으로 임진왜란을 겪었고, 35년 만에 정묘호란, 다시 9년 만에 병자호란, 그 후 또다시 찾아온 한일합방(1910년), 어찌 그뿐인가. 이젠 외침이 아닌 동족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비극의 역사 6.25, 애증의 역사로 스스로 위로만 하고 있어야 하겠는가.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된다. 민족이 겪은 비극의 역사는 언제까지 지정학적 또는 외세 때문이라는 자학적이며 안일한 생각에 젖어있어야 하겠는가. 나와 우리의 문제였다는 인식의 부재가 오늘 우리에게 또다시 비극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왜란과 호란과 식민지를 겪어보지 않고, 나아가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과 공산주의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참혹성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와 우리의 문제’라는 것은 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마디로 내분이며 당파다. 백성이 잡혀가고 죽어가고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지경에 처했어도 당쟁은 그치질 않았던 부끄러운 역사. 오늘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후예들이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굽어 살피소서, 통촉하시옵소서!” 하며 위정자들이 지킨 소신과 절개와 충성이 과연 그들의 외침같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때나 오늘이나, 오늘이나 그때나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며 명분이었을 뿐이며, 그 명분은 국민과 나라를 팔아 자신과 자신들의 세력을 지키고 키우고 유지하기 위한 매국적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전무후무한 위기 상황에서도 부끄럽고 파렴치한 역사의 DNA는 어김없이 유전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오늘날을 들여다보자.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이고 대의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다. 즉, 국민을 대신한 국회를 통해 모든 정책은 입안되고 정부는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게 된다. 따라서 대통령과 정부는 국정 운용 기조와 철학을 국민 앞에 천명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선 법안을 국회에 의뢰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국정은 운영된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통과 협치’다. 소통과 협치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시대를 접하고 있지만 말뿐이다. 지난날 역사를 살펴봤듯이 조정은 당파와 그 세력에 의한 임금과 조정이었지 결코 백성의 임금과 조정이 아니었다는 교훈이며, 오늘날 문재인 정부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입으로는 소통과 협치를 외치지만 실상은 거리가 먼 얘기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개혁이라 해도 소통과 협치가 배제된 것이라면 소용없고, 또 협치가 중하더라도 부패한 나라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소용없다. 즉,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 이 둘의 관계는 양날의 칼과 같다. 지지자들의, 지지자들에 의한, 지지자들만을 위한 소통과 정치는 또 다른 세력으로 하여금 칼을 갈게 하는 빌미를 줌으로써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말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역사가 바로 이 같은 진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어느 특정세력의 나라가 아니고 모든 국민의 나라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으며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나라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반면교사라는 말처럼, 역사는 거울이며 스승이라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까지 했다. 역사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가 있기에 오늘이라는 현재가 있고 오늘의 우리가 살아있고 또 살아가는 이유인 것이다. 지난 역사를 무조건 부정해선 안 되는 이유며, 나만 정의라는 오만함도 버려야 하는 이유다. 지나친 판단은 판단한 그것으로 내가 판단을 받게 된다는 이치를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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