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독립문 (출처: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오늘날 독립문 (출처: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영은문 헐리고 세워진 독립문
광복 후 우표 등에 도안 활용
도시개발로 독립문 결국 이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할 것을 결정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생략) 이 문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 내용이다. 외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독립을 선언하면서 세워진 독립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유와 평화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어느덧 독립문이 세워진지도 120년이 됐다. 이와 관련, 서울역사박물관의 ‘독립문 120년의 여정’ 전시를 통해 독립문 건립 전후의 시대적 상황과 그 의미를 들여다봤다.

영은문 사진(1904년) '꼬레아 에 꼬레아니' 까를로 로쎄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영은문 사진(1904년) '꼬레아 에 꼬레아니' 까를로 로쎄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영은문과 독립문

중국과의 주요 교통로인 의주로에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조문이 있었다. 영조문은 세종 즉위년(1419)에 홍살문의 형태로 처음 세워졌으나 중종 32년(1537) 중국의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일부 수용해 한 칸 규모의 대문으로 세웠다. 이듬해 중국사신에 의해 영은문(迎恩門)으로 명칭이 바뀌게 됐다.

임진왜란으로 모화관(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과 영은문은 손상됐다. 이후 수리하던 중 선조 39년(1606)에 중국 사신으로 온 주지번의 글씨로 현판을 걸었다. 광해군 때에도 2차례의 수리기사가 확인되고 있으며, 병자호란 이후 인조 20년(1642)에도 영은문을 중수했다고 한다.

개항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 끝에, 청을 제압한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압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수립된 내각은 청의 종속을 끝내는 상징적인 행위로 영은문이 철거됐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인정받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다시 내각을 구성했고 서재필의‘독립신문’의 창간을 지원했다. 이후 정동클럽의 관료들은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공원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해 이를 추진했다. 독립문은 영은문 자리에 세워졌다. 국민모금행사를 통해 모인 기금으로 만들어진 15m 높이의 문은 파리 개선문을 본뜬 모습이었다. 독립문 앞 두 개의 돌기둥은 영은문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이다.

독립문 사진(1888~1889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독립문 사진(1888~1889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관광안내 책자 등 독립문 소개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문에 대한 신문기사는 많지 않았다. 전차의 개설, 시구개정, 사건사고 기사는 단순한 지명 언급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총독부의 검열에 의한 압수나 삭제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관광안내 책자나 엽서, 지도에서는 독립문이 자주 등장했다. 그에 대한 설명에는 일관되게 ‘서대문 밖 의주로에 있는 청일전쟁의 결과 완전한 독립국이 되어 중국의 속박을 벗어남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웅장한 건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광복 이후 1947년 11월 16일 서울시에서는 서재필의 귀국을 맞아 독립문 건립 5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광복 이후 독립문의 도안은 우표, 화폐, 교과서 등에도 활용됐다. 특히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활용된 사례가 많다. 화폐의 경우에는 광복 후 최초로 발행되는 지폐부터 독립문의 도안이 등장했다. 1954년에 발행된 백환권은 앞면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이, 뒷면에는 독립문이 도안됐다.

6.25전쟁으로 손상된 독립문, 국가기록원 소장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6.25전쟁으로 손상된 독립문, 국가기록원 소장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독립문 옮겨지다

1960~1970년대 서울은 인구증가와 시역 확대에 따라 도로 정비와 확충이 빠르게 진행됐다. 독립문은 주변도로 확장으로 섬처럼 고립됐다. 도시의 급속한 발전은 문화재 보존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독립문도 이 같은 상황에 처했다. 이후 1979년 2월 27일 독립문 이전이 확정되고 그해 3월 19일부터 12월 24일까지 독립문은 해체·이전·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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