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로랑생 ‘세명의 젊은 여인들’. (제공: 예술의전당)ⓒ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마리로랑생 ‘세명의 젊은 여인들’. (제공: 예술의전당)ⓒ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마리 로랑생전-색채의 황홀’… 韓 최초

다양한 각도와 오브제로 작품 재조명해

“그림 통해 세상의 고통 감싸 안으려던

작가의 의지 반영된 것으로 보여져”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영원히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예술가가 있다. 프랑스의 화가 마리 로랑생(1883~1956)이다. 형태와 색채의 단순화와 양식화 속에 자기의 진로를 개척한 마리 로랑생은 감각적이면서도 유연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낸 여성 화가다.

‘몽마르트의 뮤즈’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자’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은 마리 로랑생은 한국인에겐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졌다.

파리의 여성들을 화폭에 담아냈던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100여년 전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색채와 매혹적인 감각을 뽐낸다.

마크 샤갈과 더불어 세계 미술사에서 색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마리 로랑생은 입체파와 야수파가 주류이던 당시 유럽 화단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

마리로랑생 ‘초상화’. (제공: 예술의전당)ⓒ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마리로랑생 ‘초상화’. (제공: 예술의전당)ⓒ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정금희(전남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마리 로랑생은 윤곽선을 없앤 1차원적 평면성과 부드럽게 녹아드는 듯한 파스텔 색채만으로 평안함을 주는 형태를 완성했다”며 “이는 그림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려 했던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마리 로랑생전-색채의 황홀’이 오는 3월 11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국내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70여점의 유화와 석판화, 수채화, 사진과 일러스트 등 총 160여점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또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던 1900년대 초반부터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1950년대까지 작가의 전 시기를 망라하는 작품들이 공개된다. 아울러 코코 샤넬과 헬레나 루빈스타인 등의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렸고 북 디자인과 실내 장식, 발레 의상에까지 영역을 넓혔던 마리 로랑생의 예술세계가 패션 및 뷰티, 그리고 상업 디자인 전반에 걸쳐 끼친 영향을 다양한 각도와 오브제를 통해 재조명한다.

전시는 20대 무명작가이던 시절부터 대가로서 73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시절까지 마리 로랑생의 전 시기의 작품을 삶의 궤적에 따라 추적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가가 겪은 일생을 통해 변해가는 그림체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울러 연극배우 박정자가 깊이 있는 목소리로 작품을 소개해 그림의 이해를 돕는다.

마리로랑생 ‘파블로 피카소’. (제공: 예술의전당)ⓒ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마리로랑생 ‘파블로 피카소’. (제공: 예술의전당)ⓒ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꽃피운 예술적 감각

마리 로랑생은 1, 2차 세계대전의 풍랑 속에서 영화나 연극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100여년 전 마리 로랑생은 미술교육기관인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입체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파블로 피카소의 작업실이자 전 세계에서 파리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세탁선(洗濯船, Bateau-Lavoir)을 드나들고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리 루소 등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를 일궈간다.

마리 로랑생은 피카소의 소개로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열애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열애는 엉뚱하게도 1911년 벌어진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기욤 아폴리네르가 연루 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1912년 기욤 아폴리네르는 실연의 아픔을 담아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명시가 된 ‘미라보다리’를 발표한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독일인 남작과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마리 로랑생은 섬세하고 미묘하게 색채를 사용해 그 어떤 예술가와도 견줄 수 없는 화풍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1920년대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여성 예술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다.

마리로랑생 ‘자화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마리로랑생 ‘자화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5

1920~1930년 10년간 마리 로랑생은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악화된 건강과 사회적인 고립으로 인해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950년대 그녀의 작품은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으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그의 열정을 식히지 못했다. 마리 로랑생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죽기 며칠 전까지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예술의 혼을 불태웠다.

1956년 6월 8일 일요일 밤 심장 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한 손에는 흰 색 장미를 다른 한 손에는 운명적 사랑을 나눴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받은 편지 다발을 든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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