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아니하고, 권력분립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헌법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말은 헌법이 권력과정에서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권력담당자의 권력을 견제하는 수단임을 잘 시사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정부관계자 등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아 통치하는 공직자들이 헌법과 법률에 의해 적법하게 통치해야 한다는 것과, 또 권력자들이 국정 수행과정에서 행여 권력이 남용되는 경우 그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 최선의 대책은 ‘잘 마련된 헌법’이라는 것이니 헌법의 중요성을 깨우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만큼 중요한 헌법을 두고, 지금 정치권에서는 통치자의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국민의 권리보장을 확보하기 위해 개헌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현행헌법이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7년 10월 29일 공포됐으니 시행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그동안 노태우 정부로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과 국민은 일관되게 개헌 목소리를 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내각제 개헌이 대두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4년 중임제 대통령 임기 등이 주요 골자가 언급됐지만 주권자인 국민보다는 권력자의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개헌의 불은 좀처럼 지펴지지가 않았다.

한 나라의 근본법인 헌법을 자주 개정하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제도를 두고, 최고권력자의 권력 남용이 다반사로 이어져 국민적 권리가 침해받는 입장에서 그대로 존치하는 것 역시 좋은 건 아니다. 헌법의 요체가 되는 통치 권력제도에서 대통령에 대한 간접선거 등 제도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일이었고, 우리 국민도 그에 호응해 체육관 대통령을 뽑은 유쾌하지 못한 일도 많이 경험해왔던 터라 개헌은 고양이목에 방울달기였다.

군부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7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말기, 우리 사회에서 노도의 물결과 같이 일렁이던 민주화 요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머지, 당시 노태우 여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라는 6.29민주화 선언을 했다. 그 이후 개헌을 위한 여야 합의는 급물살을 탔던바 그해 8월에 여야 8인회담에서 합의된 헌법개정안이 발의돼 10월 12일 국회에서 의결되고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9일 공포에 이르게 됐다. 6.29민주화선언이 나온 지 꼭 4개월 만에 6공화국 헌법이 탄생한 것인데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개헌이 이루어진 셈이다.

개헌하자는 게 국민적 대세다. 최근 본지 조사에서 응답자의 74.2%가 개헌에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4명 중 3명꼴로 개헌을 원하는 것은 헌행헌법이 30년 전에 만들어져 현재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환경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이지만 그 근간은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6공화국 헌법의 대통령 단임제는 최고권력자 한 사람에게 막강한 권력이 부여되고 있다. 그 헌법에 기초해 임기 5년의 단임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국정을 두루 살피고 국민에게 책임지는 행위에서 비켜가다 보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통제할 장치가 없었다. 그 좋은 사례가 박근혜 정권이 보여준 국정농단의 교훈이다.

그간 국민이 보아왔듯 대통령과 가까웠던 민간인에 의해 국정이 송두리째 농단되는 것은 국가조직과 통치의 원리에도 어긋나며 반(反)민주적 작태다. 그 연장선에서 대통령이 적법한 절차 없이 무단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도 반헌법적이다. 지난 정부의 잘못된 국정운영 가운데 현재 나타나고 있는 개성공단 입주기업에 대한 철수 명령이나 일본군 위안부 합의과정에서 당사자들의 의견 반영 없이 정부 측의 임의 결정 등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해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들이 현행헌법에 담기지 않았다. 잘못된 이 모든 결과들은 고스란히 국민 피해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헌법 개정이 정치권은 물론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하는 것이 좋다. 여야는 개헌 시기를 두고 줄다리기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오는 6월 13일 지방선거시 국민투표를 하자는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국민투표 비용 1300억원을 아낄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에 반해 자유한국당에서는 개헌 국민투표가 동시에 실시될 경우 자칫하면 개헌의 중요성이나 충실도가 지방선거에 묻혀 의미가 퇴색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국회 개헌특위 활동 시한이 6월말인 만큼 개헌안을 충실히 다듬어 연말 안으로 개헌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개헌안 마련은 정치인들의 몫이지만 그들만의 룰이 아니라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계약문서이기에 국민의사가 근간이 돼야 한다. 꼭 본받아야 할 건 아니지만 현행헌법은 개정안이 대두된 지 4개월 만에, 여야 합의 후 2개월 만에 탄생했다. 지금까지 1년 넘게 개헌특위 활동이 있었던 터, 꼭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야는 당리당론에 빠져 개헌 시기에 대해 샅바싸움 할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를 충분히 보장하고, 국민의 생각을 우선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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