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상하이 YMCA 총간사 시설 애쉬모어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8
1920년대 상하이 YMCA 총간사 시설 애쉬모어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8

[천지일보 천안=박주환 기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는 1883년 1월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조지 필드 피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는 형제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1909년 컬럼비아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YMCA 간사로 활동했다. 또한 1918년 주중 미국대사 환영행사에 여운형을 초대해 한국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중재했다.

1919년에는 미국에서 설립된 한인구제회가 모금활동에 어려움을 겪자 아버지와 함께 미국인 선교사들을 모아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집했고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인 ‘인성학교’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자 적극적인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애쉬모어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투탄의거 직후 피신해 온 김구 일행을 한 달 동안 자택에서 숨겨줬고 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그의 부인 제랄딘과 김구를 부부로 위장해 상하이에서 탈출시켰다.

한편 안창호의 체포 소식을 듣고 프랑스 언론사와 경찰서장에게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경찰의 불법적인 한국인 체포와 탄압을 방조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정신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질타하며 프랑스인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부인 제랄딘은 1941년 미국에서 한미협회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며 미국 정부와 중국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44년 애쉬모어는 일본과 전쟁에서 한국광복군을 활용하면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OSS부대의 합동작전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애쉬모어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 1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1968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은퇴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몬트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9년 96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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