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범근 수원 감독이 지난 6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전북과의 고별경기를 치른 후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경기장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독일 분데스리가 리그 정복… ‘갈색 폭격기·차붐’ 애칭 얻어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한 가장 불운의 스타를 꼽으라면 축구팬들은 아마도 ‘AC 밀란의 전설’ 조지 웨아(44, 라이베리아)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월드컵 우승을 노리기 위해 그의 귀화를 수차례 추진했지만 실패로 끝난 바 있다. 조지 웨아는 아프리카에서도 축구 변방인 라이베리아 대표팀으로 출전했지만 끝내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하고 은퇴했다.

이에 못지않게 차범근(수원 전 감독) SBS 남아공월드컵 해설위원도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한 불운의 스타로 꼽을 수 있다. 차범근 위원은 선수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차례 무대를 밟았던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별다른 활약을 못한 채 조별리그 탈락을 경험한 바 있다. 그의 화려한 축구경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월드컵 성적이다.

왜 그러한지는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0시즌 동안 308경기에 출장해 98득점을 올려 1999년 스위스의 사퓌자 선수가 경신하기 전까지 외국인 최다 경기출장 및 득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페널티킥은 단 한 번도 차지 않았고, 거칠기로 유명한 분데스리가에서 경고는 단 한 장만 받는 진기록도 세웠다.

독일 역시 최고의 윙포워드였던 차범근에게 매료돼 자국 대표팀으로 귀화를 추진했지만 차범근의 거절로 실패한 바 있다.

차범근이 활약하던 80년대 당시만 해도 분데스리가는 유럽리그 중 최고의 위치에 있었고, 누구나 가장 꿈꾸는 무대였다. 70년대에도 베켄바우어, 루메니게 두 걸출한 독일 최고의 선수를 배출시킨 최고의 리그였다.

▲ 차범근 ⓒ천지일보(뉴스천지)
차범근의 목표는 당초에는 월드컵 출전이었다. 그러나 1974년과 78년 아시아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면서 월드컵을 먼 곳에서만 바라보게 되자 더 큰 꿈을 꾸게 된다. 바로 독일 분데리스가 유럽 선진 축구에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 1978년 연말 혈혈단신으로 독일로 건너갔고, 최하위인 다름슈타트의 신인선수 테스트에 참여했다가 6개월 단기 계약 체결에 성공했다.

차범근은 데뷔전을 순조롭게 잘 치렀고, 독일 언론은 일본의 오쿠데라에 이어 동양에서 건너온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돼서 차범근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왔다. 한국으로부터 군대로 소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당시 국민들은 차범근이라는 대형선수가 해외로 나가면 큰 자본의 유출이라고 여겼고 그가 나라와 국민을 버리고 독일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특혜로 5개월을 단축해줬던 군 복무를 마저 이행하게 하고 그를 붙잡아 두려 했다.

결국 차범근은 1979년 1월 한 달여 만에 다시 돌아와 군 복무를 하게 됐지만 다시 독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국민들 중에서도 ‘그를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 ‘왜 한국은 스타를 키울 줄 모르는가’라는 여론이 들끓자 군 복무를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79년 8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게 된다.

데뷔전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주간 베스트 11에 뽑혔고, 세 경기 째에 첫 골을 신고한 후 3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면서 이 때부터 ‘차붐’이라는 애칭을 얻게 됐다. 붐(Bum)은 독일어로 폭발할 때 나는 소리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차범근은 입단 첫 해 12골을 터트렸고, UEFA(유럽축구연맹)컵 결승에서 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면서 팀에 사상 첫 UEFA컵 우승을 안겼다. UEFA컵은 현재 유럽 챔피언스리그의 시초가 된 대회다.

이로 인해 그는 ‘갈색 폭격기’란 별명까지 얻는 등 최고의 데뷔 시즌을 치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 독일에서 3번째로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로 등극한다. 이에 그는 1980-81 시즌 팀에 서독 FA 우승컵을 안기며 보답했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동안 122경기에 출전 46골을 기록했다.

특히 81시즌에는 레버쿠젠의 겔스도프에게 깊은 백태클을 당해 선수생명에 위기를 겪기도 했다. 차범근의 부상으로 인해 분데스리가에는 선수를 지켜주기 위해 파울을 완화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구단의 재정난으로 1983년 레버쿠젠으로 이적할 때는 프랑크푸르트 팬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레버쿠젠에 간 차범근은 하위팀에 머물던 팀을 단숨에 상위팀으로 끌어올렸다. 1985-86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MVP로 선정됐고, 1988년에는 또 한 번의 UEFA컵 우승을 하게 된다.

레버쿠젠은 1차전 패배로 스페인 에스파뇰을 3-0으로 이겨야 연장전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2-3으로 지고 있던 후반 막판 차범근이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리며 결국 승부차기 끝에 구단 사상 첫 우승컵을 차지하게 됐다.

차범근은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됐고, 지난 18일은 차범근이 은퇴한 지 21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독일 최대 축구전문 잡지 KICKER는 차범근을 ‘1980년 세계축구 베스트 11’ ‘8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독일팀 입국 당시 미하엘 발락은 “여기가 차붐의 조국입니까? 너무 와보고 싶었다. 그는 나의 우상”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차범근에 대해 “나는 차붐선수를 존경한다. 어릴 때부터 차붐을 보고 자라났다. 나도 그 선수처럼 되고 싶었다(잉글랜드 ‘마이클 오웬’)” “차붐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웅이다(포르투갈 ‘루이스 피구’)” “내가 그런 공격수랑 붙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이탈리아 ‘파울로 말디니’)” “내 자신은 어느 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 정도는 아니다(독일 ‘클린스만’)”라는 등 세계적인 유럽 스타들이 그를 이 같이 평가했다.

만약 차범근이 귀화해서 한국 유니폼이 아닌 독일 유니폼을 입고 월드컵에서 뛰었더라면 그는 세계 축구사에 더 위대한 족적을 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범근은 라이베리아의 조지 웨아와 같이 약체의 조국을 위해 대표로 뛰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같이 차범근은 자신의 축구인생에서 모든 것을 이뤘지만 유독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2년에도 그랬듯 자신이 월드컵에서 못 이룬 꿈을 이번 남아공월드컵에서 아들 차두리를 비롯한 태극전사들이 원정 첫 16강의 새 역사를 대신 이뤄주길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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