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흥분과 감동, 열정 그 자체였다. 함께하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환상적인 체험이었다.

붉은악마로 거리응원에 직접 참가했다.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에 마련된 현대자동차 팬파크에서 남아공월드컵 예선 2차전 아르헨티나전의 응원을 위해 대학원 세미나 원생들과 함께했다. 2시간 동안 붉은 티셔츠를 입고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비록 한국이 큰 점수차로 져 아쉬움이 컸지만 즐겁고 색다른 체험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현직 언론인으로 신문제작 때문에, 또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는 음식점에서 경기를 지켜봐 붉은악마의 거리 응원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다. 멀리서 붉은악마의 응원을 봐오다가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갔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붉은악마가 본격적으로 태동한 한일월드컵 이전에도 많은 대규모 응원 모습을 지켜보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서 8만여 관중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환호하는 장면을 보았으며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평양 평가전에서 15만 명의 동원된 관중(관중석을 취재하면서 각 자리에 평양시내 동별표지판이 설치된 것을 확인했다)이 능라도 경기장에서 응원을 하는 모습을 직접 취재하기도 했다. 이 응원들은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이기는 했으나 수동적인 관중들로 인해 응원의 참 맛을 볼 수는 없었다.

대학원 세미나 원생들이 사회학적인 실증적 체험을 해보자고 제안, 붉은악마로 아르헨티나전 거리 응원에 참여하게 됐다. 붉은악마는 단순히 응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즐겁게 놀고 즐기는 모습이었다. 열정과 차분함을 동시에 보인 붉은악마의 응원 문화는 그 속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월드컵 공식 스폰서인 현대자동차가 자사 홍보와 마케팅을 위해 응원장소를 마련해 상업적인 분위기를 띠기는 했지만 붉은악마의 순수성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3만여 명이 전후 좌우할 것 없이 빼곡히 들어찬 자리에서 50대 이상은 필자 등을 비롯해 별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 20대의 여성이 많았다. 20~30대 남성들과 초중고생들도 있엇지만 붉은악마 주류가 젊은 여성들로 옮겨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 시작 1시간여 전부터 현대자동차가 마련한 프로그램에 따라 록밴드 크라잉넛이 ‘말 달리자’ ‘룩셈부르크’ 등으로 분위기를 띄워주면서 붉은악마의 응원열기는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특별무대에 설치된 대형 TV 스크린에서 남아공 현지 중계가 이어지며 폭발적인 응원은 고조에 이르렀다. 경기 직전 애국가방송이 흘러 나올 때 붉은악마들은 대부분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하는 열렬한 애국심을 보여 주었다.

우리 선수들이 아르헨티나의 뛰어난 개인기에 밀려 수세에 몰리는 가운데 붉은 악마들은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 등을 힘차게 부르짖으며 응원의 기를 모았다. 1골, 2골을 내주며 우리 선수들이 초조하게 경기를 이끌어 나가자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전반 종료직전 상대 수비수의 공을 가로챈 이청룡이 절묘한 골을 성공시키자 붉은 악마들은 기다린 듯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막대풍선을 두들기며 환호하는 모습이었다. 맥주 등 주류와 치킨, 김밥 등을 곁들이며 갈증과 시장기를 해결하는 붉은악마들은 전반전이 끝난 뒤 휴식시간 개인적인 볼일로 화장실을 다녀오는 이들 말고는 크게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후반전 우리 선수들이 한때 아르헨티나 진영을 압박하고 염기훈의 왼발슛이 아깝게 아르헨티나 골포스트를 살짝 빗겨나가자 안타까워하기도 했던 붉은악마는 아르헨티나가 역습으로 추가골을 잇달아 터뜨리자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떨어진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붉은악마의 참 모습은 경기 후 나타났다. 경기 내내 뜨거운 열정으로 응원에 전념했고 경기마저 패해 자칫 흐트러질 수 있었으나 앉았던 자리 주위의 쓰레기를 한 곳으로 정리하는 차분함을 보여주었다. 붉은 악마의 응원은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아폴론’적인 축제가 아닌 자발성, 열정, 창의성을 특징으로 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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