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노천명(1912 ~ 1957)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은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예저기 흩어져 촉촉이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들어 거닐어 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을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 들고 
이슬에 젖은 치맛자락 휩싸 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시평] 

가을은 명징(明澄)하다. 말간 유리알 같이 맑고 깨끗하다. 그래서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가을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있다.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소리 없이 낙엽을 밟으며 산책길에 나서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끊일락 말락 다시 이어지는 풀벌레 소리. 그 소리 명징하지만, 왠지 쓸쓸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모든 것이 비로 씻은 듯이 맑고 밝은 가을, 그 앞에 서면, 사람들의 그 마음까지고 맑고 깨끗해지는 듯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들 역시 맑고 깨끗하게 보인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고 애잔한 마음으로 사슴을 노래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 노천명. 깔끔하여 대처럼 꺾어질망정 구리처럼 휘지 않는다는 꼿꼿한 성품의 소유자 노천명 시인.

이 시인의 가을은 그래서 더욱 맑고 깨끗하다. 애연히 넘어가는 벌래 소리, 그 마디마디마다 아픔이 깃들어 있는 듯한 가을. 곱게 물든 단풍 하나 따 들고는 멀리 들려오는 기적소리 들으면, 어딘가로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가는 기적 소리 들으면, 아련한 슬픔과 함께 맑고 깨끗하게 다가오는 가을날 아침, 그 기적 소리 들으며 어딘가로 떠나가고 싶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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