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0
봉래선생 영정 (출처: 봉래기념사업회회장 양윤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0

포천서 출생, 조선 전기 문신
김정희ㆍ한호와 조선 3대 명필가
산수 좋은 변방 골라 외직 활동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우리나라 사람이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 시조의 작가는 봉래 양사언(1517~ 1584) 선생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한 양사언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인이며 서예가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 해(滄海)·해객(海客)이다. 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희수이고, 어머니는 문화류씨이다.

특히 양사언을 비롯한 사준(士俊), 사기(士奇) 3형제는 모두 글에 뛰어났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중국의 삼소에 견주기도 했다.

◆관리로서의 양사언 선생

양사언 선생은 자신의 호를 ‘봉래’로 지을 만큼 금강산을 사랑했다. 그는 자연 풍치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리 깊어 산수(山水) 좋은 변방만을 골라 외직(外職: 지방 관아 벼슬)만을 자청했다. 양사언 선생은 24세가 되던 중종 35년(1540)에 진사가 됐다. 이때 과시(科試, 과거)로 지었던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단사부(丹砂賦)다. 하지만 바로 부모상을 당해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0세가 되던 명종 원년(1546)에 문과에 급제해 이후 40여년 동안 관직에 종사했다. 양사언 선생이 처음 부임한 곳은 함길도 함흥지역이다. 그는 함흥부사로 재임하다가 명종 10년(1555)에 병을 얻고 사직 하고 귀향했다.

이후 명종 11년 대동승(大同丞)에 발탁돼 평양찰방으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열운정기(閱雲亭記)’를 지었다. 명종 15년에는 종4품인 평창군수에 제수된다. 원래 평양군수 임기가 정해져 있었지만 양사언 선생은 1년 더 재임했다. 양사언 선생의 선정(善政)에 감복한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조금 더 재임할 것을 간청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자원으로 철원, 회양 군수를 맡는다.

이때 양사언 선생은 모든 짐을 꾸려 관동지방으로 떠났다. 그는 관동지역의 아름다운 자연을 맘껏 즐기며 많은 시를 남겼다. 강릉에서도 6년간 재임했다. 이 당시 척박한 외곽지역 백성들의 어려움을 자 신의 일같이 살피고 선정을 베풀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양사언 선생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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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선생 숭모비 (출처: 봉래기념사업회회장 양윤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0

 

◆양사언 선생의 문학세계

양사언 선생은 해서와 초서에 능했던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가로 손꼽힌다. 양사언 선생은 김정희(金正喜), 한호(韓濩, 한석봉) 선생 등 조선 3대 서예가로도 꼽힌다.

주로 커다란 글씨를 잘 썼는데 금강산 만폭동에 큰 글자로 새겨놓은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여덟 글자를 두고 세인이 평하기를 “최치원의 ‘쌍계석문’ 글자가 이에 못 미친다”고 했다고 한다.

또 평양찰방 재임 시에 지은 ‘열운정기’도 세인들의 칭송을 받는 등 당대 최고 문장가로서의 글재주를 인정받았다. 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는 순국문학의 정수로써 불후의 명 작으로 전해져 후세에 도전정신과 진취정신을 일깨우고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양사언 선생은 국문학의 정형문학에도 선구자적 위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진 양사언 선생의 문학 작품은 280여편정도 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그가 세상을 보고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한 그의 성향이 담겨 있다. 양사언 선생의 문장이 세상에 빛을 발한 것은 그가 과시로 지은 ‘단사부’에서다. 단사부는 그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졌음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양사언 선생의 시는 풍류를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형제에 대한 사랑, 자신을 어린 시절 키워준 외숙모에 대한 그리움 등이 담기기도 했다.

양사언 선생은 선조 10년(1577)에 안변 부사로 부임해 말년을 보냈다. 그러다 선조 14년(1581)에 지릉(智陵)에 화재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 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선조 17년(1584)에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인 향년 68세에 사망했다.

양사언 선생은 40여년간 관직 생활을 했으나 사망 후 한푼의 재산도 남기기 않았을 만큼 청렴한 청백리였다. 비록 내직 보다는 외직으로 떠돌며 보냈으나 백성을 사랑하고 본분을 다하는 관리로서 타에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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