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 구조가 일직전상에 위치해 있어 입구에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까지 들여다 보인다. <혼불>의 표현대로 경기전에는 노거수가 즐비해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정인선 기자] “고궁(古宮)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은 건물로서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태조 진전(眞展)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안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렀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이라 각각 칭했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됐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지켜낸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돼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 경기전의 본전인 보물 제1578호 경기전 정전 ⓒ천지일보(뉴스천지)

◆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경기전 정전

경기전에 들어서기 전 정문 앞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하마비.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왕의 어진은 곧 왕의 존재를 상징하기 때문에 경기전에 들기 전에 예를 다하라는 뜻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먼저 홍살문이 눈에 띄고 외삼문, 내삼문, 정전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한눈에 정전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홍살문은 궁전(宮殿) 관아(官衙) 능(陵) 묘(廟) 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잡귀를 물리친다는 벽사(辟邪)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면 경기전의 본전인 보물 제1578호 경기전 정전이 나타난다. 경기전 건물은 맞배지붕 구조로 돼있어 우리 고건축의 엄숙하고 장엄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정전 좌우의 회랑에는 조선조 역대 왕들의 어진이 있으며, 정전 안에는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돼 있다.

정전으로 들어서 건물 정면을 보면 거북이 조각품을 볼 수 있다. 정순자 문화관광해설사는 “십장생 중의 하나인 거북이 조각을 통해 목조건물이 화마에서 벗어나 영원하길 바라는 건축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 ⓒ천지일보(뉴스천지)

◆ 조선 왕조의 초상을 찾아서

어진이 처음 제작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일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국초부터 태조진전을 경기전 등 전국 여러 곳에 어진을 세우고 본격적인 어진 봉안체제를 갖췄다.

태조의 초상화는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이 유일하다.

이 어진은 가로 150㎝, 세로 218㎝로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매미 모양의 익선관은 등극 후 우렁찬 목소리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현재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모사본이다.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 ⓒ천지일보(뉴스천지)

◆ 500년 조선 역사 지켜낸 전주사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과 충주·성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병화에 소실됐다.

그러나 전주의 선비인 안의와 손홍록이 1592년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서 전주사고에 있던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모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겼다.

이듬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무사들이 번갈아가며 조선의 역사를 지켜냈다.

조선전기 4대 사고 중 하나인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1991년 원래 전주사고가 있던 자리에 복원한 건물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선왕조의 역사를 보존하는 사고의 설치는 조선 왕실의 영원함을 바라는 점에서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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