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서울 심포니오케스트라 대표

1956년 6월 27일 서울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제1응접실에 마련된 기자회견장. 한 달 반 전에 치러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의 급서로 가까스로 대통령에 다시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은 그다지 편치 않아 보였다.

한 외국기자가 물었다. “공산당과 일본 중 어느 편이 한국이나 자유세계에 위험한 존재라고 보십니까?” 이 질문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면서도 “만일 일본군이 우리를 돕겠다며 한반도에 발을 디딘다면 총부리를 돌려서라도 일본인들과 먼저 싸울 것”이라는 식의 극단적 반일감정을 지닌 이 대통령의 입장에 시비를 걸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건성으로 이 질문을 넘긴 이 대통령은 이어 국내정치로 말머리를 돌려 야당과 언론을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장은 일순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때 26살의 젊은 기자 조세형이 벌떡 일어서 힐난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자유당의 실세 이기붕 국회의장이 국회의원들에게 돈 봉투를 돌린 사건을 알고 계십니까?” 회견은 마침내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 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낱낱이 조사해 보고하시오”라고 말한 뒤 회견장을 서둘러 떠났다.

회견이 끝난 뒤, 동료 기자들은 조 기자를 “크게 한 건 했다”며 치켜세웠다. 하지만 신바람이 나서 그가 몸담은 평화신문사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뜻밖에도 ‘파면-기자 조세형’이라는 사고(社告)였다. 한국 언론사에서 해직 기자 1호가 되는 순간이었다.

‘해직기자 1호’ ‘조코(코가 유난히 크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 ‘영원한 대(大)기자’ ‘영원한 워싱턴 특파원’ ‘권한대행’ ‘3대 기독교 장로’ ‘속필의 대가’ ‘편집의 귀재’ ‘관훈클럽 창립의 산파’ 등 숱한 별호를 지닌 조세형 씨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주기가 됐다.

지난해 6월 17일 향년 78세로 타계한 조세형 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의 1주기 추도식 및 추모문집 출판기념회가 1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장에는 생전 그의 다양한 역정을 보여주듯 전·현직 거물 정치인은 물론 내로라하는 원로 언론인들이 대거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자서전 <그래도 세상은 전진한다>, 추모평전 <시대를 앞서간 80년>, 유고집 <양비론의 포로, 언제 면할 것인가?> 등 3권이 발간됐다. 이 가운데 생전에 그와 교류했던 인사들의 회고담 등을 모은 평전 <시대를 앞서간 80년>을 들여다보며 새삼 우리 현대 언론과 정치사에서 한 그루의 ‘느티나무’처럼 큰 족적을 남긴 ‘거인’ 조세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추모담을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그의 넉넉한 풍모를 확인할 있는 단편 몇 가지를 옮겨본다.

“평민당시절, C의원이 김대중 총재와 독대 점심을 하고 오는 길이라며 우쭐댔다. 백천이 그를 불러 귓속말로 뭐라 속삭이자 C의원은 안색이 급변하더니 서둘러 사라졌다. 옆에 있던 J의원이 뭐라했는지 궁금해하자 그는 ‘김 총재가 권노갑 의원과 둘이서만 밥 먹는 것 봤나? 자네처럼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사람만 독대 점심을 하는 것이네’라고 했지. 이후 C의원은 독대 점심을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조세형과 조홍규는 같은 조씨인데도 키에서는 극과 극이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있으면 그 자리는 키 작은 조홍규의 속사포 조크와 이를 점잖게 제압하는 키 큰 백천의 앙상블로 웃음이 만개했다. 조홍규가 마구 쏘아대면 백천은 ‘사람소리는 어디선가 요란한데 정작 사람은 안보이네’라고 눙쳤다.”

제제다사들의 회고담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굳이 찾는다면 아마도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아닐까 싶다.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아니한다’는 논어의 한 구절이다.

시기와 질투, 협잡과 편가르기가 만연한 오늘의 현실에서 새삼 향기있는 정치와 강단있는 언론을 추구했던 그의 빈자리가 너무도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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