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 주인공을 기다립니다.’ 1923년 동아일보가 첫 신춘문예를 시작한 이후 유수(有數)의 신문사들이 국민백일장을 공모했고, 신춘문예를 통해 시대를 한 걸음 앞서가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 내 경험도 그러하지만 신춘문예는 문학 지망생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묘약과 같다. 신문사에서 단 한명을 뽑는 신문문예를 통과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긴 해도 패기 있는 문학 신인들은 12월의 설렘 속에서 장차 문인의 꿈을 꾸기 일쑤다.    

지금도 어쩌다가 거실 장식장에 놓인 지난시절 신춘문예 수상 사진을 보면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서 있는 나의 모습에서 얼비친 이면에 살아온 시간만큼 손때 질펀한 인생의 깊이를 가늠해 보곤 한다. 그러면서 가끔씩 회상한다. 개인마다 취향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중학교 문예반에 들어가면서 문학도로서 뜻을 두었다. 그 길이 차마 어떤 길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운율을 맞춰 시를 써보았고, 마침 학원사에서 매달 펴낸 중고등학생 월간 종합잡지인 ‘학원’책을 벗하며 문예란과 학원문학상에 응모하기도 했었다.   

학원(學園)지는 1954년 ‘학원문학상’을 제정해 문학 청소년들로부터 계속 응모를 받아왔다. 당시는 마땅한 문학공간이 없었던 시절인지라 학원문학상 입상은 문인의 예비등용문이라 할 만큼 정평이 나있었는데, 우리나라 중견 시인과 이름난 소설가 중에는 학원문학상 출신자들이 대단히 많다. 유경환 시인, 이제하 시인, 마종기 시인, 박의상 시인, 문정희 시인, 황석영 작가, 최인호 작가 등이 그들이다. 문학소년임을 자처했던 나도 중학생 때 시 부문에 여러 번 공모했지만 낙방했고, 고교생이 돼서야 산문으로 제13회 학원문학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학원문학상이 인기가 있었으니, 자료에 의하면 1954년에 공모한 ‘제1회 학원문학상’ 응모 작품이 시와 산문을 합해 무려 5천여편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 시와 산문별로 우수작 각 2편, 입선작 20편을 뽑았으니 당시 전국에서 문학도를 갈망하던 청소년들의 꿈 밭이었다. 아쉽게도 학원지는 1979년 9월호를 마지막으로 종간이 됐지만 20여년 동안 문단의 예비등용문으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던 중고등학생들의 문학적 수준은 상당했다. 

그 가운데 널리 애송되는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는 이제하(1937~) 시인의 학원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시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제1회 학원문학상을 수상했고, 또 이 시가 1960년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으니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12월 본란에서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퍼라’는 제하로 그 내용을 조금 언급했지만 충분히 다루지 못한 터라 언제 기회가 되면 상술하리라 마음먹었는데 한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 사회가 시끄럽고 혼란을 겪고 있는 시기에 마음 편히 한 편의 명시를 음미해보는 의미에서 글을 이어본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빛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 해도 좋아//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 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이제하 시인의 ‘청솔 그늘에 앉아’ 시 전문)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제하 시인은 1952년 마산동중학교 시절부터 학원 문예란에 글을 자주 올려 그 당시 문학 스타로 떠올랐으니 아무래도 그 학교 국어교사인 김춘수 시인, 김남조 시인 등의 예술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학원 책을 통해 이름을 날리던 이제하는 역시 문학소년으로 학원지에서 명성이 높던 서울 소년 유경환(1936~2007)으로부터 ‘친구 하자’는 한 통의 편지를 받고서는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쓴 시가 바로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서울친구를 마음속으로 그리는 문학소년의 호기심과 외로움이 넘쳐나 너무나 피곤하게 닥치는 그리움으로 번져났으니 애틋함이 시의 전 구절에서 구구절절이 흘러내리고 있다. 누가 이 시를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쓴 시라 하겠는가. 그야말로 문학천재라 호칭해도 모자람이 없었으니, 꿈 많던 학창시절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해 오직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감했던 젊은 날의 문학도가 보여준 감성시는 주옥같은 명시로 자리 잡았다. 

문학적 천재성을 인정받은 이제하는 홍익대 미대를 다니던 중 현대문학지에 시로 천료(薦了)된 이후 소설가, 화가 칭호까지 얻었다. 또 김영랑 시인을 그리며 만든 노래 ‘모란, 동백’을 직접 부르는 등 가객(歌客)이 되기도 했는데, 어쨌든 ‘청솔 그늘에 앉아’는 빼어난 명시다. 바쁘게 허둥대는 척박한 우리 삶에서 그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사람이 몇 있을까마는 한번쯤은 지나온 인생길을 되돌아보며 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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