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기념관은 분단의 아픔과 비극의 현실을 상기시켜주는 장소다.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이승복 사건은 ‘아픈 손가락’처럼 우리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이러한 가운데 ‘평화’를 의미하는 올림픽이 이승복 사건이 발생한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다. 이와 관련, 이승복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봤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8
이승복군 생가에서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안희관 경찰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8

‘토박이’ 안희관 경찰에게 들은 사건 진실

하루에 한집씩만 이사 가능
이승복군 생일에 사건 발생
형, 살아남아 사고 소식 알려

승복군 집 근처서 보초 서던
예비군 父 통해 소식 듣게 돼
조작 논란 발생 시 마음 아파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이곳은 고(故) 이승복군 생가입니다. 학교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죠.”

이승복기념관에 35년째 근무하는 안희관(61) 청원경찰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이승복군의 생가에서 말문을 열었다. 이곳은 1968년도 북한 무장공비가 춥고 배고픔에 지쳐 내려와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현장이다. 생가는 1970년대까지 빈집이었다가 이후 생존자의 증언과 고증을 거쳐 복원됐다.

생가는 이승복기념관에서 차를 타고 한참 산길로 들어가야 했다. 울창한 산림이 조성된 이곳 계방산일대는 북한 무장공비의 도주로가 연결돼 있다.

생가에 대해 설명하는 안 경찰은 용평면 일대에 살아온 토박이다. 이승복 사건이 났을 때 안 경찰의 나이는 11살이었다.

“강원도 산골에는 화전민이 많이 살았어요. 이승복 생가는 초가삼간 귀틀집으로 돼 있습니다. 당시 무장공비가 곳곳에서 나타나서 만행을 저질렀는데, 정부에서 ‘독가촌’을 만들어 주민의 안전을 위해 이주시켰죠. 이승복군도 다음 날이면 이사할 차례였는데, 그 날 밤 사고를 당한 거예요. 그날은 이승복군 생일이기도 했어요.”

그때 아랫집 먼저 이사하는 관계로 할머니는 외부로 나가셨고 아버지는 이삿짐을 나르러 가고 집에 없었다고 한다. 원거리라 보니 하루 동안 여러 집이 이사하지 못했다. 자동차도 없고 나르는 수단이 없으니 리어카나 지게로 이동해야 해서 하루에 한집씩만 이사가 가능했다. 이에 집에 있던 어머니, 형, 승복군, 남동생 , 여동생 등 5가족이 사고를 당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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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군 생가를 둘러보는 안희관 경찰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8

 

“원래 무장공비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체를 땅에 묻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추운 겨울이어서 땅이 얼어 흙을 파지 못해, 시체를 쌓고 퇴비더미를 그 위에 얹었죠.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난 형이 정신적으로 버티면서 아랫집까지 기어가 사고 소식을 알렸습니다.”

지게를 짊어지고 늦게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무장공비에게 화를 당할 뻔 했으나, 골이 깊은 계곡으로 뛰어 내려가 황급히 도망쳤다고 한다.

안 경찰은 이승복 사건을 당시 예비군이던 아버지에게 들었다. “승복이네 집근처에 보초를 서던 우리가(예비군이) 철수하자마자 무장공비가 들어와서 사건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13킬로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인근에서 일이 발생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조작 논란이 일어났을 때는 사건 당시현장에 있던 중대장과 예비군들, 파출소지서에서 근무했던 모든 이들이 가슴을 쳤다고 한다. 그날이 생생한데, 조작 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안 경찰은 그래도 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안 경찰은 “두 번 다시 이승복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라며 “화해와 협력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살기 좋은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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