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김종순 선생 묘(제공: 문학박사 조성린 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4
김종순 선생 묘 (제공: 문학박사 조성린 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4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의 청백리에는 대표적으로 김종순 선생(1405~1483)이 있다. 김종순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시호는 공호(恭胡), 본관은 경주(慶州)다.

그는 조선 개국공신이자 좌찬성을 지낸 김균의 손자다. 아버지는 김계성, 어머니는 강원도관찰사 이정간의 딸이다.

김종순 선생은 세종 9년(1427) 생원시에 합격했다. 1437년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혜택으로 얻던 관직)으로 충훈부사승을 거쳐 1439년 전농시 직장(直長:조선시대 각 관서의 전곡·비품 등의 출납실무를 주관하던 종7품 관직)을 맡았다.

이 해에 문과에 합격해 한성부 중부(中部)의 관직을 맡았고, 1441년에는 병조좌랑을 맡았다. 병조좌랑 재직 중 부사직 이보흠을 사직(司直:조선시대의 오위의 정5품 관직)으로 승진시켜준 게 잘못돼 문제가 됐다. 하지만 공신자손이라고 해 파직이 그쳤다. 그 후 복직돼 직책이 여러 번 옮겨졌다. 세조 5년(1459)에는 형조참의를 거쳤고, 여러 직책을 거친 후 세조 8년(1462)에 경기관찰사를 지냈다.

이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1463년 봄에 세조가 경기고을을 순행하다가 김종순 선생의 여행용 주머니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 안을 확인해 보니 쌀과 콩 두어 말이 있을 뿐이었다. 임금이 곧 그를 불러 ‘술잔을 올리라’고 명한다. 그러면서 “청렴하고 간소함이 너무 지나쳐서 관찰사가 거의 굶어 죽게 됐다”고 농을 건넸다.

이 해에 한성부윤이 되고 세조 10년(1464) 대사헌이 됐다. 세조 11년(1465)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됐다.

김종순 선생은 여러 조정을 두루 섬겨서 당시 일어났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드러난 자취는 없을지라도 또한 지나친 일은 없었으며 시사에 능통해 명성이 높았다.

도움말: 문학박사 조성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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