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기축사화(선조 22년, 1589년)는 정치적 목적으로 서인들이 무고한 동인 세력 천여 명을 살상시킨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시대를 앞서 간 사상가 정여립을 역모사건의 주동 인물로 기억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이제 우리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

기축사화에 연루된 관련자 대부분은 훗날 바로 잡아 신원이 회복되었으나 유독 정여립만 제외되어 있었다. 그가 명백한 역모의 주동자였다면 그와 가까웠던 관련자들이 과연 명예회복이 가능했을까?

정여립은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예조좌랑을 거쳐 정3품 수찬 벼슬을 지내다가 선조 임금의 미움을 받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주로 낙향하였다.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사농공상의 반상을 구분하지 않고 인재들을 받아들였다.

평소 율곡의 10만 양병설에 동조하고 있던 그는 왜적의 침략을 예견하여 허물어진 성벽을 수리하고 진안 죽도에 서실을 세우고 천반산에서 자경적 군사조련을 했다. 관군의 보고를 받은 중앙 조정에서도 백성들을 향약으로 교화시키고 불순한 기미가 없었으므로 묵과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을 위한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왜적 천여 명이 전라도 해안을 통과하여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해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관군은 유사시에 대비한 아무 준비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다급했던 전주부윤 남경언은 정여립에게 대동계의 출병을 간곡히 요청했다.

정여립은 국가의 위기 앞에 솔선하여 대동계 육백여 명을 지휘하여 뛰어난 용병술로 정예군이었던 왜적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뒤늦게 김명언과 장군 신립을 출병시켰으나 이미 정여립이 왜적을 깨끗이 소탕한 뒤였다. 왜적의 침입은 국가의 비상사태였다. 국가의 환란 앞에 조정의 대응이 그 정도라면 나라의 안위란 있을 수 없다.

조정은 대동계의 공적을 전주부에서 상세하게 장계를 올렸는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정여립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사재를 털어 대동계의 노고를 위로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는 민본사상에 바탕을 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대동계원들에게 향약을 실시하고 강론도 했다. 그가 꿈꾸는 개혁은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고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뜯어 고치는 것이었다.

동인 세력과 가까웠던 정여립이 내세운 진보적 개혁은 정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서인세력에게 이용당하고 말았다. 정여립은 그들이 조작 날조한 음모에 죽음을 맞이했다. 서인들은 진안 현감을 사주하여 암살시킨 정여립의 죽음을 자살로 몰아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왕의 지지를 받은 칼자루를 쥔 서인들은 닥치는 대로 살육을 했다. 동인 천여 명이 살상되었다.

정여립과 친분이 있던 전라도사 조대중은 다른 임지로 떠나면서 아끼던 기생과 헤어지는 것이 슬퍼 눈물 한 방울 흘린 것이 빌미가 되어 정철에게 끌려가 장살되었다. 조대중과 옛적에 안부 편지 주고받은 충무공 이순신마저도 혐의를 받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심지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까지도 묘향산과 오대산 사찰에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렇듯 동인이라면 씨를 말리려고 서인들은 작정을 하고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다. 세간에서 그런 서인들을 빗대어 ‘동인 사냥꾼, 인간 백정’이라 불렀다.

역모의 고변이 임금에게 올라간 시각에 정여립은 아들과 수하 한 명을 동행하고 덕유산을 거쳐 진안 죽도에서 조용히 단풍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역모를 일으킬 자가 한가하게 단풍구경을 한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았다.

당시는 그와 가까웠던 동인세력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어 굳이 모반을 할 이유가 없었다. 모반을 할 사람이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가? 서인들은 암살한 정여립의 죽음을 자살로 조작해야 역적질이 인정되는 것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가 역모를 했다는 결정적인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를 죽인 것은 서인들에게 이용당한 역모가 아니라 그가 품었던 세상을 개혁할 원대한 꿈이었다. 우리는 이제 기축사화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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