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훤 행복플러스연구소 소장 

 

시간이란 내가 선택한 사건들의 연결이다. 필자의 경우, 지금은 칼럼을 쓰는 것을 선택했고 끝나면 다시 어떤 일들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선택된 사건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인생일지 모르겠다. 행복도 마찬가지로 선택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사람들이 세 끼를 라면으로 때워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지려는 기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지인은 남편이 술을 너무 잘 마셔서 늘 걱정이다. 당연히 그 분은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에 잔소리를 달고 산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본인은 물론 남편, 게다가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가 불행하다. 당연히 남편이 선택을 해야 한다. 술을 마시다가 건강을 잃더라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갖는 것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술로 인해 건강을 해치는 것이 싫다면 주량을 좀 조절하고 적당히 마시든지, 아니면 끊든지,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을 했다면 주변 사람들 또한 그 선택을 존중해 줘야 한다.

자녀교육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필요하긴 하지만 막상 본인은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부모의 선택에 의한 스케줄로 움직이다보니 굳이 잘 할 이유도 없고 잘못될 경우 선택한 사람을 원망하면서 결과에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문제는 잘 됐을 때조차도 기쁨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평가했을 때, 정말 최고의 선택만을 해왔고 최고의 인생이 됐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얼마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인생을 더 잘 살기 위해 어떤 선택들을 하며 살까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기에 자녀나 남편, 또는 아내의 인생에 자꾸 개입하려 한다면 아마 죽도 밥도 안 되는 엉망진창의 삶이 돼버릴지도 모른다. 심하게 표현하면 자신의 삶도 잘 살지 못하면서 누구의 삶을 참견할 수 있단 말인가?

위의 제목처럼 행복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신이 중심이 돼야 한다. 그래야 그 결과가 어떻든 행복으로 연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계약결혼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쟝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대학교 다닐 때 만나서 나중에 사르트르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죽은 사르트르의 옆에 누울 정도의 깊은 슬픔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의 선택을 철저하게 존중했고 심지어는 서로의 연인관계에서도 상대의 선택에 터치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가 최고의 예술가로 남을 수 있었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자신의 모든 선택들이 자신의 삶을 만들고 또 그 삶에 애정을 갖게 만들고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선택을 빼앗은 것이고 심지어 행복조차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둔 지인도 남편에게 진심으로 건강한 삶을 바라고 있으며 술이 건강한 삶을 어떻게 해치는지에 대한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나 그 이상의 개입은 월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누구나 삶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또 그로 인해 행복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권리를 잘 이용해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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