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봉 대중문화평론가

정통 개그프로그램들이 죽어가고 있거나 죽었다. 요즘 TV를 켜면 버라이어티 천국이라고 느낄 정도다. 노래를 예능과 엮어 만든 버라이어티는 양반이다. 낚시예능, 연예인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이야기, 연예인 패키지여행, 연예인 집주인과 셋방 식구의 동거 등 소재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예능들을 보고 나면 무언가 허전하고 추억도 없고 남는 것이 별로 없이 느껴진다. 화려한 스타들의 평범한 일상과 뒷이야기들, 가면 뒤에 숨어 누가 노래를 하는지 식상하고 궁금하지 않다. 1997년에는 MBC ‘오늘은 좋은 날’ ‘폭소앨범’, KBS ‘코미디 세상만사’ ‘웃음천국’ ‘코미디 일번지’, SBS ‘웃으며 삽시다’ ‘코미디 전망대’ 등 지상파 3사에서 한 주간 방송되는 코미디 프로그램만 10개였다.

10년 전만 해도 KBS 개콘은 20%대, SBS 웃찾사는 10%대 중반, MBC 개그야는 10%를 찍었던 시절도 있었다. 현재 개콘은 7%대, 생존한 TVN 코미디빅리그가 시청률 2%대를 유지하고 있다.

필자를 잘 알고 있는 현직 개그맨 최모씨는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생계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함께 일하고 있는 후배 개그맨들도 직업을 버리고 또 다른 직업을 찾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다행스럽게 대학로를 꾸준히 방문하고 웃찾사든 개콘이든 대학로 공연을 많이 보러오는 관객들 덕분에 힘이 나고 즐겁게 공연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고 했다.

왜 정통 개그프로그램들이 무너지고 있을까. 정말 대중의 취향이 변한 탓일까. 아니면 신진 방송작가들로 인해 새로운 콘텐츠를 탐구하고 대중의 취향을 변하게끔 만든 것일까. 최근 육아방송과 ‘먹방’이 이전보다 열풍이 사라진 듯 보여 정통 개그프로그램들이 다시 부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요즘 시청자들은 솔직한 콘텐츠를 좋아하는 듯 보인다. 출연진과 간접적으로 소통하고 짜여진 각본이 아닌 리얼을 추구하고 프로그램에서 주인공들이 곤혹스러워하고 당혹해하며 “나도 저랬었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스토리에 채널을 고정한다.

하지만 ‘솔직 콘텐츠’들도 조금씩 식상해지고 있다. 종영한 SBS 웃찾사를 필두로 새로운 정통 개그프로그램들이 다시 부활해야 한다. 풍자의 대상을 약자에 대한 외모 비하로 견주는 시대는 끝이 난 듯 보인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풍자의 대상인 강한 상대가 무너지고 혐오당하고 웃음거리로 전락되는 걸 원한다. 그것을 보고 통쾌함을 느끼고 박수를 친다. 그 이유는 우리 주변에 갑질에 허덕이는 약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강한 상대가 개그코너에서라도 풍자되고 웃음의 먹거리로 묘사됐을 때 시청자들은 강한 동의와 더불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지금은 1인 톱 MC, 아이돌, 탤런트를 두루 패널로 내세워 진행되는 버라이어티가 마치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1인 톱 MC 몇 명이 예능계를 장악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돌 가수, 탤런트를 끼워 넣는 기형적인 예능 구조가 언제쯤 변화할 수 있을까. 이러한 유형의 예능 지배구조는 코미디와 예능을 통해 먹고 살아야 하는 수많은 개그맨들의 목을 조르고 생존 위협에 시달리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된다. 이제 예능 방송작가와 피디들은 새로운 인물 투입, 스토리텔링의 방향성,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유쾌한 메시지에 주목하고 조금 더 재능 있고 숨어있는 많은 개그맨들을 방송에 출연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작가나 PD들 역시 정통 개그에 기초한 웃음을 생산해야 한다. 시청률만 지향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코미디의 발전 형태를 예능계에 접목해야 한다. 몇몇 인기스타의 독식 모델이 돼버린 현재의 예능에서 벗어나야 에너지가 넘치는 많은 개그맨들이 기회를 얻고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다. 능력 있는 개그맨들이 피디나 작가의 선택을 받지 못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조차 하지 못한 채 잊혀가는 현실은 방송국의 손실과 더불어 시청자들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시청률 올리기에만 급급해하지 말고 버라이어티의 다양성, 개그의 발전을 위해 우리 모두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다. 공중파 방송 3사에서 진행하는 개그프로그램만이라도 다시 부활해야 한다. 지금도 프로 개그맨들을 위한 꿈의 무대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들은 지금도 방송에 나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열공 중이다. 등을 돌렸던 시청자들도 개그맨의 입과 손짓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연예인들의 평범한 일상에만 주목하지 말고 오랜 시간 동안 개그맨들이 짜서 제공하는 희극 코너에 담겨져 있는 개그 철학과 풍자, 사회적 메시지에 눈을 뜨고 여운을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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