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인생의 맛을 느껴요,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에요”

▲ 인생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엄앵란 닥스클럽 대표 컨설턴트(5월 27일 닥스클럽).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이길상 기자] 일흔 다섯에 결혼정보회사 대표 컨설턴트로 칠년 째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김치공장까지 만들고 일주일에 삼일을 출근한다. 거기에다가 틈나는 대로 방송국에도 출연한다. 이도 모자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한다.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라고 말한다.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1964년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당시 하객과 일반 시민 4천여 명이 몰린 ‘세기의 결혼식’ 주인공 엄앵란의 일상이다.

◆ 불교와의 인연

이제야 인생의 맛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그를 만나기 위해 강남역 근처의 사무실을 찾았다. 인터뷰는 영화배우로서의 화려한 삶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불자 엄앵란’ ‘인생 선배 엄앵란’으로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엄 대표는 서울 서대문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가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절을 가게 됐다. 절에만 가면 좋다고 하면서 할머니 손을 잡고 따라 다녔다. 열 살 무렵엔 해방이 됐다. 먹을 것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 절에 가면 먹을 곳이 풍성했다. 할머니가 절에 가신다고하면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갈 채비를 먼저 했다. 혹시 데려가지나 않을까 대문에서 기다려 섰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악재를 넘어 ‘진관사’로 산보를 다녔다. 절의 알록달록한 절 단청을 아이들은 싫어했으나 그만은 좋아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진관사를 다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 따라 교회를 가기 전까지는 종교는 불교만 있는 것으로 알았다.

엄 대표가 불교의 신앙이 깊어지게 된 동기는 마흔 여섯 살 때 남편(신성일)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돼 가세(家勢)가 완전히 기울게 되면서부터다.

부모나 주위사람들을 의지할 수 없었다. 그가 매달릴 곳은 부처님밖에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만 했고 스님들의 법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기도가 계속되자 은연중 마음 속에 깊은 깨달음이 왔다.

“그래 인생은 다 그런 거지.”

엄 대표는 “네 인생은 반반이다. “좋은 것 50%, 나쁜 것도 50%이니 실망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광부가 또 다른 보석을 찾는 마음으로 광산을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절을 다녔다”고 말했다.

특별히 인연이 있는 스님이 있냐는 질문에 엄 대표는 “남편이 선거에서 낙선하고 대구에서 18년 동안 식당을 했다. 식당을 통해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되찾았다. 그 당시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를 다녔는데 주지 배도운스님은 말없이 남은 것을 알려줬다. 서울에서는 진관사의 진관스님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줬다. 진관스님 역시 꼭 짚어준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소연 할 때마다 한마디씩 해 준 것이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며 두 분에게 존경을 표했다.

엄 대표는 종교인이 편협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서로 자기종교가 좋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종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목사님·신부님 말씀도 듣고 있다. 어떤 종교가 ‘더 좋다’기보다는 ‘다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종교에 편파적인 생각은 없다. 각 종교에 충실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종교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그는 남편이 선거에 출마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며 선거 세 번 치르고 난 후 철이 들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지금은 급할 것이 없다. 항상 템포를 늦춘다. 느림보 인생인 것이다. 그렇다고 게으르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서두르는데 엄 대표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방황하지 않는다. 차근차근 할 수 있는 능력을 엄 대표는 불교에서 배웠다고 했다.

◆ 전국 돌며 여성강좌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성강좌 강의를 한다고 하는데 무슨 내용을 전하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매일 죽겠다’ ‘매일 못 살겠다’ 하면서도 세월을 보낸다. 인생에 있어 실망도 하고, 고민도 하는데 그러지 말라. 인생에는 사계절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화하는 것이 삶이다. 봄이 좋다고 매일 봄일 수 없지 않느냐. 매일 봄이길 바란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이처럼 불평불만하지 말라는 내용을 강의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아파트 110호 210호 506호 711호 다 들어가서 냄비뚜껑 열어봐라. 안 끓는 냄비 있느냐. 끓이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며 “내 주위·환경 탓하지 말고 불만 없이 살면 편하다. 사람과 사람이 사는데 어찌 충돌이 없겠는가. 싱싱한 생선도 윗목에 삼일 있으면 냄새난다. 사람이 어떻게 똑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 감안해서 말과 행동에 조심하라는 것이다. 좋은 일 한다고 남을 해치는 것은 벌 받는 짓이다. 내 1원을 벌기위해 남의 10원 없애는 것은 자멸의 길이다. 양보하고 살자”라고 전했다.

또 그는 인생을 오(O)와 엑스(☓)라고 표현했다.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생각이 짧으면 엑스(☓)쪽 생각을 하고 생각이 깊으면 오(O)쪽으로 생각한다. 매사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생각이 있으면 불행은 저 멀리로 도망간다. 모진 풍파 모진 세월 겪고 나니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사에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여기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도록 감사하다. 삶에 불만이 없으니 마음이 편하고 하는 일도 술술 풀린다. 잘난 척하면 옹이가 진다. 물 흐르듯 몸을 맡기면 되는데 그러지 못해 괴로운 것이다. 마흔 여섯 살 때는 모든 것을 원망했다. 왜 나만 불행할까. 왜 내 남편만 선거에서 떨어질까. 그러나 새벽기도를 다니며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다. 요즘 나는 눈뜨면 감사, 하루 종일 감사하며 산다”며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을 강조했다.

▲ 지난 1월 BTN불교TV 붓다야 붓다야에 출연한 엄앵란 씨(엄앵란 씨의 젊은 배우 시절 사진을 사회자 이상벽 씨와 엄앵란 씨가 보면서 웃고 있다. 오른쪽이 엄앵란 씨). ⓒ천지일보(뉴스천지)

◆ 배우는 나의 운명

다시 태어나도 배우의 길을 걸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배우밖에 할 것이 없다. 배우는 인생을 다 보고 죽는다. 다른 사람의 인생도 체험한다. 1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내 인생 74년을 ‘체험 삶의 현장’으로 살았다. 주위 사람들의 원인·결과를 다 봤다. 남들이 겪을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보니 인생의 깊을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먼저 인생이 밤중에 산책하는 것이었다면 다음 생은 대낮에 푸른 산과 아름다운 꽃도 보면서 여유 있는 멋진 삶을 살 것”이라고 답했다.

엄 대표를 인터뷰하는 동안 어느 철학자 못지않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그 진솔함이 대화의 깊이를 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60세 되던 해 <뜨거운 가슴에 좌절이란 없다>라는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주제로 한 내용의 책을 펴냈다.

이어 IMF 시절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23세에는 <사색의 구름다리>라는 시집을 발표했다. 그는 “낙서 같은 책 세 권을 냈다”며 부끄러워했다. 지금 책을 쓴다면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말하자 엄 대표는 “요즘 사람들은 책을 많이 쓴다. 그래서 나는 자신 없다. 사람들이 다 늙어 잘난 척 한다고 흉 볼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건강관리 비결을 묻자 엄 대표는 “나는 잠을 많이 잔다. 그래서 남편이 잔소리를 많이 한다”며 “진짜 건강비결은 김치에 있다. 나는 철저한 한식(韓食)주의자로 양식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나물·야채를 좋아한다. 얼갈이배추를 데처서 바글바글 우거지 찌개를 만들어 밥 위에 우거지를 얹고 고추장과 함께 먹으면 최고다. 김치를 많이 먹어야 속이 편하다. 빵을 먹고 생목이 올라올 때에도 김치 국물을 먹으면 속히 편해진다”며 자신을 ‘신토불이’라고 표현했다.

요즘 근황에 대해 묻자 엄 대표는 “사물이 요새는 제대로 보인다. 지금은 나무껍질 색깔조차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나무껍질이 벗겨지면서 변화되는 자체가 예술이다.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대자연의 예술인 것이다. 개울물 흐르는 것을 보고 ‘넌 참 예쁘다’라고 말하면서 자연을 만끽하고 싶다. 출퇴근길의 ‘능소화’가 내 눈길을 끌고 있다. 죽은 나무에 엉클어져 오르면서 마치 그 나무의 주인처럼 능청을 떨지만 색깔은 예쁘다. 하루를 살다가 꽃이 지는 능소화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 2박 3일 여행을 떠난다. 이번이 열 번째다. 통영을 갈 것이다. 시간 약속 없이 떠나는 것이며 구체적인 계획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약속 없는 시간을 즐긴다”면서 “마음이 괴로울 때 홀로 둑에 가서 황혼이 질 때까지 관찰해 봐라. 거기서 답이 나온다”며 땅만 보며 살지 말고 때론 하늘을 쳐다보면서 자연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기를 당부했다.

엄 대표와는 인터뷰는 시간이 부족해 아쉬웠다. 한국 최고의 배우로서 누릴 것을 다 누려봤을 그였고, 또 인생의 쓴 맛을 다 경험한 그이기에 엄 대표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담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만나는 사람은 절대 성내는 사람이 없다”는 그의 말처럼 더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소망을 심어주는 일을 오래오래 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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