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슈퍼 위크’ ‘슈퍼 노벰버’ 이번 주, 이번 달에 외교적 볼거리가 많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이 G1과 G2 ‘시황제’의 만남, 즉 미·중정상회담이다. 북핵문제는 작금 위험천만한 군사적 옵션까지 거론되는 세계적 현안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주석의 대좌에서 이번에는 가닥이 잡힐까 궁금하다. 북핵 프로그램을 저지하는 데는 중국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시진핑이 북핵해결사로 나서겠다고 지난 3월 플로리다 마라라고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에 언약한 내용이 미국 언론에 흘러나오기도 했다. 중국 방문에 큰 기대를 표시해온 트럼프는 그래서 시진핑 집권2기 체제를 구축한 중국의 19차 당 대회를 내심 기다렸다고 한다. 관전포인트는 그간 북핵문제 해결에 소극적 입장을 보여온 중국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까 하는 것이다. 중국 역할에 따라 국면 전환의 계기가 마련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내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김정은 노동당위원장까지는 몰라도 북한이 대표단을 보내고 개막식에 러시아 중국 정상 등이 참석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의 FTA 재협상, 중국과의 관계 회복 등에 촉각이 곤두세워진 상황이다. 트럼프의 이번 순방을 통해 꼬일 대로 꼬인 외교적 현안들에 물꼬가 트일지 두고 볼 일이다.

일본은 이방카에 이어 트럼프를 극진히 예우했다. 화기애애한 골프 회동으로 시작한 트럼프의 방일을 보면 미·일관계가 긴밀하기 그지없다. 아베 총리가 비굴할 정도로 납작 엎드리자 트럼프는 일본에 엄청난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일본과의 무역불균형 문제는 강력압박했다. 미국자동차와 F35스텔스전투기 등 미국산 제품 구매에 아베의 긍정적인 화답을 이끌어냈다. 중국 견제라는 공통 목표로 한 배를 탄 두 정상의 모습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냉철히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과 일본이 치밀한 계산에 따라 상업적 보따리를 서로 주고받고 있다. 우리는 무역불균형 압박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한다는 얘기다. 거래에 일방적인 것은 없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 과거에도 중국 왕서방에게 비단 한 자락을 얻기 위해선 귀한 개성 인삼 한 상자라도 안겨줘야 했다.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를 찾은 상황. 무엇을 주고 무엇을 되받을 것인가. 그러나 마찬가지다. 다 품에 끌어안고 다 닫을 수는 없다. 작은 것과 과거의 것을 주고 큰 것과 미래의 것을 미국에 받아내자. 예컨대 정부 지원과 추후 보상을 전제로 1차 산업 쪽을 좀 양보해주고 고부가가치에다 향후 후발경제효과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 첨단산업 쪽을 얻어내면 어떨까. 혹은 미국의 첨단군사장비를 구매해주는 대신 자동차나 전자·통신 등 다른 부문에서 이익을 얻어내면 어떨까. 이는 필자가 단견으로 그림을 그려본 1차방정식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원칙은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라는 말이다.

최근 ‘사드 추가 배치 노(No), 미사일방어체제(MD) 편입 노(No), 한·미·일 동맹 노(No)’라는 한국의 ‘3불 방침’이 전해지며 미국이 불편해한 분위기다. 우리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여론조사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나 필자 생각에 ‘3불 방침’은 오히려 박근혜 정부 때부터 분명히 했어야 했다고 본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단절돼 잃는 이익은 천문학적이다. 또한 우리 국민이 일본과 중국을 받아들이는 시각은 서로 다르다. 두 나라는 역사적 문화적 토대 등에서 느낌상 사뭇 다른 면이 있다. 굳이 조선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다시금 예로 들지 않더라도 ‘3불 방침’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물론 최우선은 한·미동맹이 굳건히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피로 나눈 한·미동맹에 따른 국가적 공조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함께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미국 아닌 다른 비동맹 국가들과의 실리적 외교관계가 전방위로, 다원화외교로 지혜롭게 펼쳐져야 한다. 특히 지리적 경제적으로 너무나 가깝고 북한에 대한 지렛대까지 한손에 쥐고 있는 중국과 외교적으로 냉담해져서는 안 된다. 외교는 두 마리 세 마리 토끼를 다 겨냥해야 하는 것 아닌가.

토인비는 문명은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야 탄생과 성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토플러는 현대의 지식정보화사회를 ‘제3의 물결’이라고 했다. 19세기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일찌감치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나 아편전쟁 이후 곤욕스러운 시기를 보낸 중국이 거대한 공룡으로 떠오른 것이나 다 어리석고 답답한 쇄국정치로 일관했던 구한말과 대조적이다. 즉 일본과 중국이 지금처럼 강국이 된 것은 과감히 변화를 수용하고 창의력과 도전정신을 불태운 데 따른 것이다. 때마침 지구촌은 제4차 산업혁명시대. 변화와 도전은 다시 시작됐다. 한반도 주변 열강이 각각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국익우선주의를 꾀하고 있는 가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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