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과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 오래전부터 시장은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한 영역으로 존재해 왔다. 또 급변하는 현대 속에서도 시장은 제 자리를 지키며 오가는 이들에게 정을 나눠주고 있다. 이와 관련, 선조들이 삶이 담긴 전통시장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오늘날의 시장의 가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 남대문시장 양은 그릇 가게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6.25전쟁 후 장사 활발
물건 불법 판매도 성행
단속 시 순식간에 사라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세월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얽힌 장소다. ‘남대문 시장에 없으면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부터 이곳은 민족의 삶터였다. 남대문 시장이 형성되기까지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남대문시장 기원

교통이 발달된 오늘날에야 필요한 물건을 집근처 시장에서 쉽게 살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 장터를 쉽게 왕래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더욱 질 좋은 물품은 장사꾼에게 사야했다. 장사꾼은 보통 다섯 마을 정도를 왔다 갔다 하며 물품을 팔았다. 이에 5일장에 생겨났고, 날짜를 맞춰야만 시장에서 장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장이 열리는 곳을 찾아다니는 ‘장돌뱅이’, 등짐을 지거나 머리에 물건을 이고 물품을 파는 ‘보부상’이 늘어났다. 오늘날 종로 주변에는 종운가가 형성되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의 경우 1414년(태종 14년) 정부임대시전이 개시되면서 그 기원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 안으로 상평창을 설치했다. 상평창은 물가 조절, 기근 구제에 목적을 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흉년이 든 해 봄에 관곡을 팔았다가 그해 가을에 사들이는 일을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상품경제가 발달해 관곡을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방식은 효용을 잃었다. 이에 1608년 조선 정부는 대동법을 시행했고, 상평창이 폐지되고 선혜청을 설치했다. 선혜청은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생긴 관청으로 대동미와 대동포 등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그러던 중 1897년 선혜청 주변으로 큰 시장이 형성됐다. 선혜청 창고 앞에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도성 근교의 농민도 채소나 과일 등 도성민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가져왔다. 이를 바탕으로 선혜청 앞 조시는 준상설시장으로 발달해갔다.

▲ 1988년 서울 남대문시장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천지일보(뉴스천지)

◆광복 후 ‘도깨비시장’ 돼

일제강점기 남대문시장은 경성부 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상인과 고객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일본인에 의해 시장은 사라질 뻔 했지만, 다행히 경성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으로 살아남았다.

6.25전쟁 후 남대문시장은 도깨비 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6.25전쟁 후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도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이나 미군 부대를 통해 세금을 내지 않고 물건 판매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때 관청에서 단속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어느새 ‘휙’ 사라지는 것이었다. 멀쩡히 있던 시장이 사람들 보기에 사라진 것처럼 보이니 도깨비 시장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후 남대문시장상인연합회가 꾸려졌고 1964년 건물주와 상인들이 공동 출자한 주식회사의 형태로 이어졌다. 1960~1970년 수차례의 화재와 재건축을 겪기도 했지만 시장은 비약적 성공과 공간 확장을 이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제품과 수입품이 넘쳐나 도깨비시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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