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면서, 도성민의 삶을 지켜온 울타리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도성의 기능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한양도성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발굴과 복원과정을 거치면서 잃었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와 관련, 한양도성 전 구간인 18.6㎞를 직접 걸으며 역사적 가치를 몸소 체험하고자 한다.
▲ 한양도성 백악구간 ⓒ천지일보(뉴스천지)

[창의문~혜화문]
길게 이어진 성벽, 갈수록 가팔라져
도성서 가장 높은 곳인 ‘백악마루’
경복궁과 세종로, 한강 등 훤히 보여
울창한 소나무숲에 관광객 줄지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백악산)은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높다. 오늘날 서울 경복궁과 청와대 북쪽에 위치한 북악산은 과거 한양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한양도성 순성길의 마지막 코스로 선택한 백악구간은 창의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창의문은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던 것을 1741년(영조17) 다시 만들었다. 창의문 위쪽에는 창의문안내소가 있는데, 이곳부터는 군사보호구역이므로 신분증을 지참한 후 신청서를 작성해야 출입이 가능했다.

▲ ⓒ천지일보(뉴스천지)

◆백악마루와 1.21사태 소나무

성벽을 따라 한양도성길에 올랐다. 산세를 따라 길게 이어진 성벽은 갈수록 가팔라졌다.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뒤편으로 한쪽이 경사진 북악산이 보이는 데 그곳이 바로 여기였다. 중간에 돌고래 쉼터와 백악 쉼터가 있어 인왕산 등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40분 거리에는 백악마루가 있다. 백악마루는 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표석 하나가 서 있었다.

이곳에서는 경복궁과 세종로, 한강 건너 63빌딩까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구간을 97개로 나눴는데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으니 시작 구간은 ‘천(天)’, 끝나는 구간은 ‘조(弔)’였다. 이곳이 바로 ‘천(天)’ 구간에 해당했다.

백악구간을 지나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는 ‘1.21사태 소나무’가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했고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과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했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됐고, 이후 1.21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나무에는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도 과거의 흔적을 보며 지나간 사건을 떠올렸다.

해발 293M의 청운대에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청운대에서 10분 정도 거리에는 백악 곡성이 있었다. 곡성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으로, 인왕산과 백악산에 하나씩 있다. 이 중 백악곡성은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으며, 도성을 둘러싼 서울의 산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꼽힌다.

▲ 1.21사태 소나무를 보고 있는 시민ⓒ천지일보(뉴스천지)

◆숙정문과 말바위

이곳부터는 완전한 내리막길이다. 성벽을 따라 길을 계속 걸으면 한쪽으로 소나무 숲이 잘 조성돼 있었다. 자연과 함께 자라온 소나무는 유난히 더 푸릇푸릇했다. 이곳이 과연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맑은 공기를 자랑했다.

저 멀리 숙정문이 보였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건설과 함께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건립됐다. 첫 이름은 숙청문이었으나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남아 있는 도성문 중에서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유일한 문이다.

또한 다른 도성문과 달리 육축의 상부 천장이 석재 홍예로 구성돼 있다. 이 문은 1413년(태종13)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폐쇄됐다. 이후 가뭄이 들어 비를 빌기 위해 문을 열었고, 평상시에는 동북쪽 문인 혜화문이 그 기능을 대신했다. 삼청지구 성곽 복원 때, 문루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기도 했으나 1976년 문루가 복원됐다.

숙정문으로 혜화문 방향으로 길을 걸으면 말바위가 등장한다. 말바위의 유래에는 세 가지 설이 전해진다. 백악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다가 산줄기의 끝에 위치한 바위라 하여 말(馬)바위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모양이 말(馬)과 같이 생긴 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또 조선시대에 문무백관이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쉬던 자리에 타고 온 말을 매어놓았다고 하여 말바위라는 설도 있다.

▲ 백악구간 청운대 ⓒ천지일보(뉴스천지)

◆북정마을과 혜화문

와룡공원 옆으로 도성 안쪽 길을 따라 걸으면 성북동으로 빠지는 암문이 등장한다. 이곳 문밖에 있는 북정마을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심우장이 있다. 또 성북동 비둘기를 지은 시인 김광섭 선생의 집이 있었다. 1960~1970년대 서울의 정취가 남아 있어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활용된다.

이곳에서부터는 성벽이 잠시 단절됐다가 경신중·고등학교 뒷길에서 성벽이 이어졌다. 경신학교는 1885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정동에 설립된 언더우드 학당을 시초로 한다.

뒷길을 따라 길을 걸으니 백악구간의 마지막 장소인 혜화문이 등장했다. 함경도로 연결되는 동북 관문으로 속칭 동소문으로 불렸다. 첫 이름은 홍화문이었으나 1511년(중종6)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혼동된다고 해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18.6㎞의 한양도성 전 구간.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의 울타리였던 한양도성은 오늘날까지도 도시민의 삶을 지켜주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등재를 기대해 본다.

▲ 혜화문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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